Editorial

런웨이 대신 시사회: 패션 하우스의 새 무대

카메라 앞의 패션은 이제 광고 너머를 바라본다. 브랜드들은 시즌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리고 제품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세계를 이미지와 서사로 짜맞추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옷의 순간을 기록하던 카메라는 이제 패션 하우스의 세계를 통째로 확장하는 렌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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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 대신 시사회: 패션 하우스의 새 무대

카메라 앞의 패션은 이제 광고 너머를 바라본다. 브랜드들은 시즌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리고 제품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세계를 이미지와 서사로 짜맞추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옷의 순간을 기록하던 카메라는 이제 패션 하우스의 세계를 통째로 확장하는 렌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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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 대신 시사회: 패션 하우스의 새 무대

카메라 앞의 패션은 이제 광고 너머를 바라본다. 브랜드들은 시즌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리고 제품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세계를 이미지와 서사로 짜맞추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옷의 순간을 기록하던 카메라는 이제 패션 하우스의 세계를 통째로 확장하는 렌즈가 되었다.

패션 필름은 더 이상 캠페인의 확장판이 아니다. 요즘 하우스들은 ‘광고 영상’을 넘어 아트필름, 단편 영화,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시네마틱 언어로 브랜드를 설명한다. 런웨이를 대체한 시사회, 영화감독과의 장기 협업, 시리즈 형식의 필름 유니버스까지. 패션은 지금 옷이 아니라 ‘서사’를 입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패션하우스가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

생로랑 프로덕션의 로고. ⒸSaint Laurent

패션 브랜드가 영화를 만든다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시즌마다 공개되는 캠페인 영상, 패션위크 초대장을 대신하는 티저 필름은 이전과 달리 제품보다는 스토리를 담는다. 이어 거대한 하우스 브랜드를 비롯한 패션 브랜드들은 아예 영화제를 겨냥한 단편을 제작하고, 런웨이 대신 시사회를 개최한다. 옷을 보여주기 위한 영상이 아니라, 세계관과 정체성을 설계하는 하나의 ‘시네마 유니버스’로 패션 필름을 사용하는 시대다. 덕분에 패션 필름의 크레딧의 이름들도 점차 화려해지고 있다. 미우미우가 2011년부터 매년 선보이는 여성 주도의 단편영화 커미셔닝 플랫폼 <우먼스 테일Women’s Tales> 시리즈에는 여성 영화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 앨리스 디옵Alice Diop 등 오늘날 가장 독창적인 여성 감독들을 초빙한다. 샤넬의 남성 향수 ‘블루 드 샤넬BLEU DE CHANEL’을 위한 필름은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감독과 할리우드에서 가장 뜨거운 배우, 티모시 샬라메Timothee Chalamet의 조합으로 완성됐다.

1분 이내 길이의 쇼츠, 릴, 틱톡 등 쇼트폼 영상만으로 브랜드의 세계관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반면 영화는 비교적 긴 시간의 집중을 요하고, 그 시간 동안 관객의 감정과 기억을 브랜드에 묶어둘 수 있다. 영화가 브랜드의 아카이브를 서사로 풀어낼 수 있는 형식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아카이브, 그리고 컬렉션은 단순히 소품처럼 장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닌 드라마와 캐릭터의 요소로 자리한다. 최근 ‘생로랑 프로덕션Saint Laurent Productions’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제작사로 출범한 생로랑처럼 칸 영화제와 같은 플랫폼에 진입하면, 브랜드는 “예술의 후원자”라는 위상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전 세계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이런 이유로 패션 필름은 광고와 예술의 경계에서, 브랜드가 두 언어를 동시에 발화하게 되는 지점이다. 광고 및 캠페인 중심의 전통적 마케팅이 효율을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럭셔리 브랜드들이 문화예술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맥락 속에 이 전략이 녹아져 있기도 하다. 

브랜드들은 더 이상 ‘룩을 보여주는 영상’에 만족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세계관을 통째로 상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런웨이와 룩북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과 뉘앙스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다 깊게 스며든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이 영화들이 결국 소비자를 매장으로 이끄는 ‘럭셔리 콘텐츠’로만 남을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도 독립적인 작품으로 회자될 ‘진짜 영화’가 될 것인지. 지금, 패션 하우스들은 그 경계선 위에서 실험을 계속하는 중이다. 그 사이에서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 시즌을 이해하는 데, 룩북이나 패션위크의 런웨이 컷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생로랑 프로덕션, 브랜드에서 영화사로

(왼)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감독하고 에단 호크와 페드로 파스칼이 출연한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 포스터. ⒸSaint Laurent
(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파르테노페> 포스터. 셀레스트 달라 포르타와 게리 올드만이 연기했다. ⒸSaint Laurent

이 변화의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생로랑이다. 생로랑은 2023년 4월 ‘생로랑 프로덕션’이라는 이름의 영화 제작 레이블을 공식적으로 출범시키며, 럭셔리 브랜드로서는 최초로 단순 협업을 넘어 영화 산업의 중심으로 직접 들어간 사례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안토니 바카렐로Anthony Vaccarello는 패션을 통해 감독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를 지원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고 제가 존경하는 감독들과 협업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제 개인적인 비전을 형성해 준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고 그들에게 주목받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는 생 로랑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작품을 지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업적인 영화는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는 그의 말을 더듬어보면 단기적인 프로모션보다는 장기적인 문화 자산을 구축하려는 의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첫 작품인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의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Strange Way of Life>를 시작으로 짐 자무쉬Jim Jarmusch, 클레르 드니Claire Denis, 자크 오디아르Jacques Audiard,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등 쟁쟁한 감독들의 작품을 제작 및 후원하며 칸 국제 영화제 경쟁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칸 영화제에서 10분간 기립박수를 받은 것으로 이슈를 모았던 파올로 소렌티노Paolo Sorrentino 감독의 <파르테노페Parthenope>는 생로랑 프로덕션이 제작하고 독립영화계에서 화제작을 연일 내놓으며 또렷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영화사 A24가 배급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들 속에 생로랑 로고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의상과 무드, 캐릭터를 통해 하우스의 이미지가 스며든다. 옷은 브랜드의 광고물이기보다 영화적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고, 브랜드는 ‘럭셔리 메종’을 넘어 ‘아트하우스 후원자’이자 ‘프로덕션’으로 소비자에게 각인된다.

프라다 갤러리아, 아트하우스 감독들이 바라본 가방 

프라다 갤러리아를 테마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연출한 <리추얼 아이덴티티>. ⒸPrada

프라다는 오랫동안 영화감독과의 협업을 통해 ‘지적인 패션 필름’의 방향을 만들어온 하우스다. 2025년 프라다는 아이코닉한 백, ‘갤러리아’를 위한 캠페인 <리추얼 아이덴티티Ritual Identities>에서는 작가주의 성향이 짙은 예술 영화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와 말이 필요 없는 연기력과 인지도를 지닌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을 기용해, 정체성과 의식을 주제로 한 짧은 필름을 제작했다. 전년도에는 조너선 글레이저Jonathan Glazer가 같은 가방을 둘러싼 다른 내러티브를 만들었고, 올 시즌에는 란티모스의 기묘한 세계관 속에서 동일한 오브제가 새로운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스칼렛 요한슨은 여기서 여러 정체성을 연기하며 갤러리아 백은 더 이상 소지품을 넣기 위한 제품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의식을 비추는 프레임이자, 여러 자아를 지닌 존재를 담는 그릇으로 작동한다. 프라다는 감독들의 서로 다른 해석을 시즌별로 쌓아 올리며, 하나의 제품 라인에 ‘감독 시리즈’라는 문화적 아우라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기존 룩북이나 모델 중심의 광고 대신 감독 중심의 예술 작품으로 제품 캠페인을 승격시키려는 의도이다. 또 갤러리아 캠페인이 매년 감독을 바꿔가며 고유한 영상 작품으로 제작되는 방식은, 브랜드가 제품을 ‘한 시즌이 지나면 잊히는 것’으로 만드는 대신 ‘기억되는 문화 코드’로 구축하려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구찌 <더 타이거(THE TIGER)>, 패션위크를 대체한 영화

구찌 2026 S/S 쇼를 대체한 <더 타이거> 포스터. ⒸGUCCI

구찌는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런웨이를 영화로 대체했다. 뉴스가 나오자마자, 아니 그 전부터 루머로 패션 업계를 들썩였던 구찌의 문제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는 자신의 첫 컬렉션인 ‘라 파밀리아La Famiglia‘를 위해 밀라노 패션위크 개막과 함께 전통적인 패션쇼 대신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 할리나 레인Halina Reijn이 연출한 30여 분 분량의 영화 <더 타이거THE TIGER> 시사회로 공개한 것.

<더 타이거>에 출연한 데미 무어. ⒸGUCCI

팔라초 메초노테Palazzo Mezzanotte를 통째로 빌린 이 이벤트에서 관객은 런웨이 좌석이 아닌 극장 좌석에 앉아, 데미 무어Demi Moore, 에드워드 노튼Edward Norton, 엘리엇 페이지Elliot Page 등이 연기하는 ‘라 파밀리아La Famiglia’ 서사를 지켜본다. 영화는 ‘구찌 국제 지사장’ 역할을 맡은 데미 무어가 생일 파티를 열고 가족·게스트들과 식사를 하려 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예상했던 축제 분위기는 곧 균열을 드러내며, 권력 사이의 긴장감이 드라마틱하게 폭발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드러내는 건 사실 하나의 패션쇼나 컬렉션 발표가 아니라, 브랜드가 내부적으로 갖고 있던 서사(가족, 권력, 유산)와 그 유산이 현대에 재해석되는 방식이다. 실제로 구찌 가문이 겪은 피살 사건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타이거>에 출연한 에드워드 노튼. ⒸGUCCI

영화 속 배우들이 입고 있는 모든 룩은 뎀나의 첫 구찌 컬렉션이자, 동시에 영화 속 캐릭터를 규정하는 코스튬이다. 이 35분의 영화는 브랜드의 새 방향성, 아카이브에 대한 태도, ‘부와 가족, 퍼포먼스’에 대한 뎀나 특유의 시선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구찌에게 이 필름은 시즌용 프로모션이 아니라, 브랜드 리부트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긴 프롤로그에 가깝다. 패션쇼의 관람 경험을 ‘시사회’라는 이벤트로 치환한 셈이다. 

젠틀몬스터 <더 헌트(THE HUNT)> , 패션으로 번역한 공포 영화 

나디아 리 코헨이 연출하고 헌터 샤퍼가 주연한 영화 <더 헌트> 포스터. ⒸGentle Monster
<더 헌트>에서 헌터 샤퍼가 연기하는 모습. ⒸGentle Monster

국내 브랜드의 경우, 젠틀 몬스터가 가장 앞선에서 이러한 현재적 경향을 이끌고 있다. 2025년 가을 컬렉션을 위한 것으로, 배우 헌터 샤퍼Hunter schafer가 출연하고 독창적 시각 언어로 알려진 영화감독이자 사진가인 나디아 리 코헨Nadia lee cohen이 연출했다. 이들이 제작한 <더 헌트THE HUNT>는 아이웨어 캠페인을 기존에 브랜드가 다루기 어려워했던 호러 장르로 재구성해 장르적인 도발을 시도하며 단편 영화에 가까운 구조를 완성한다. <더 헌트>는 일상적인 장면에서 불협화음, 복제된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들로 전환하며 호러 장르의 코드이면서 동시에 젠틀몬스터가 오랫동안 구축해온 비현실적이며 기이한 브랜드 미감과 정확히 맞물린다. 이 캠페인에서 제품인 ‘심플라인Simple Line‘ 아이웨어는 화면에서 주연처럼 부각되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이 경험하는 감정의 굴절, 세계의 불온함, 그리고 서사의 긴장을 공감각적으로 조직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또한 <더 헌트>는 글로벌 시장 전략에서도 의미가 크다. 캠페인은 미국에서 먼저 공개되었고, 호러 장르가 지닌 대중성과 Z세대 선호도를 적극 활용했다. 공식 홈페이지의 <THE HUNT> 소개 페이지 하단에 스토리형 인터랙티브 게임 <THE ROOM>을 함께 공개해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했다. 한편 샤퍼의 캐스팅은 젠더 및 정체성, 서브컬처의 지형에서 높은 상징성을 지니며, 브랜드의 글로벌 감도와 정서적 확장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제품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이 방식은, 오히려 브랜드 정체성을 더 공고히 하는 전략이 된다. 세계관은 일관되고, 감정은 강렬하며, 브랜드는 스스로 만들어낸 장르 안에서 존재의 무게를 키운다.

르메르의 <나인 프레임스(Nine Frames)>, 패션 필름의 본질적 미학

르메르의 단편 필름 프로젝트 <나인 프레임스> 속 배우 배두나의 모습. ⒸLemaire

굵직한 거장들의 이름이 연일 언급되는 패션 필름의 경향 속에서 르메르는 유독 조용하나 가장 구조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나인 프레임스Nine Frames>라는 이름의 단편 필름 프로젝트는 르메르가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구축하고 있는 브랜드 리듬, 관조의 미학, 비서사적 구성 방식을 가장 정교하게 보여준다. 즉, 르메르는 패션 필름을 여타 브랜드와 달리 스토리텔링의 수단이 아니라 브랜드의 감각적 구조를 드러내는 분석적 도구로 사용한다. 캠페인에는 촬영 감독 토비아스 블리클레Tobias Blickle와 배우 배두나가 합류했다. 

르메르의 단편 필름 프로젝트 <나인 프레임스>의 장면. ⒸLemaire

이 영상은 스토리, 인물, 갈등 같은 전통적 영화 문법을 거의 완전히 제거하고, 한 시즌의 컬렉션을 구성하는 시간과 공기, 리듬을 9개의 감각 단위로 분해해 제시한다. 서사 없이도 강도가 생기는 이유는, 이 필름이 옷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옷이 존재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인물의 액션보다 움직임 사이의 간극을 더 오래 응시하고, 행동의 결과보다 그 행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미세한 긴장을 포착한다. 느린 제스처, 정지에 가까운 구도, 천이 피부를 스치는 마찰음 같은 미세한 소리는 모든 장면을 패션 광고가 아닌 감각 분석의 장으로 만든다. 르메르의 옷이 언제나 여백과 완급, 절제된 감정의 결을 갖는 이유가 이 영상 안에서 분명해지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르메르가 이 필름을 단순 온라인 콘텐츠로 소비시키지 않고, 서울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를 작은 상영관처럼 활용해 관람 경험으로 확장했다는 사실이다. 매장은 판매 공간이 아니라 브랜드의 시간성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재해석되었고, 관객은 손님이 아닌 관찰자로 자리하게 된다. 이 결정은 르메르가 패션을 즉시성의 산업이 아니라 태도의 세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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