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시계는 종종 대사보다 정확하게 인물의 정체성을 설명해 왔다. 최근 시리즈 예고를 마친 〈F1 더 무비〉부터, 영화사에 길이 남은 클래식들까지. 스크린 위 시계들은 스타일링 액세서리를 넘어 영화적 세계를 작동시키는 서사 장치로 기능해 왔다. IWC 샤프하우젠의 인제니어, 오메가 씨마스터, 해밀턴 카키, 롤렉스 데이 데이트, 태그호이어 모나코. 이 다섯 개의 시계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물과 서사를 견인한다.
F1 더 무비 × IWC 샤프하우젠 ‘인제니어’




모터스포츠를 다룬 영화에서 시계는 필연적으로 ‘정확성’과 ‘기술력’을 상징한다. 오직 시간으로 승패를 가르는 모터스포츠에게 인간의 감각 대신 기계로서 시간을 관리하고,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 현실 세계에서도 2013년부터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Mercedes-AMG PETRONAS 팀의 공식 엔지니어링 파트너로 활약하고 있는 IWC는 영화 속 가상의 팀 APXGP와 함께한 것을 기념하는 스페셜 에디션을 2025년 워치스 앤 원더스Watches and Wonders를 통해 공개한 바 있다. 그중에서도 <F1 더 무비>의 주인공, 소니 헤이즈 역의 브래드 피트Brad Pitt의 손목 위에는 IWC 샤프하우젠IWC Schaffhausen의 ‘인제니어Ingenieur’ 컬렉션이 있다. 전설적인 시계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Gérald Genta에 의해 1950년대에 발명되었고 최초의 민간용 항자기성 손목 시계라는 배경을 지닌 아이코닉한 스포츠 워치, 인제니어 컬렉션은, 극한의 속도와 기술 경쟁이 벌어지는 F1 세계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이 시계는 화려한 장식이나 감정적 상징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기능적 미학, 계산된 구조, 그리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는 기계적 질서를 상징한다. 이는 레이서라는 캐릭터가 요구받는 태도, 즉 감정을 억제하고, 숫자와 데이터에 따라 움직이는 냉정함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특히 이 시계는 인제니어 초기 모델을 모티브 삼아 빈티지 워치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클로이스터 워치 컴퍼니Cloister Watch Co.와 협업으로 새롭게 디자인한 것으로, 오래된 가치를 선호하는 ‘올드스쿨한’ 소니 헤이즈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007 시리즈 × 오메가 ‘씨마스터’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다니엘 크레이그가 차고 나오는 ‘오메가 씨마스터 다이버 300M’, 그레이드 2 티타늄으로 제작해 가볍고 내부식성이 뛰어난 워치. ⒸOMEGA
제임스 본드의 손목 위에는 언제나 오메가OMEGA 씨마스터Seamaster가 있다. 1995년 <007 골든 아이>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작인 2021년 <007 노 타임 투 다이> 까지, 무려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하며 007의 아이콘으로 활약한 워치다. 특히 제임스 본드를 여섯 번째 연기하고 있는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디자인에 참여해 새롭게 탄생한 ‘씨마스터 다이버 300M 007 에디션’은 해군 출신 첩보원이라는 캐릭터를 고려해 탄생했다. 그의 요구에 따라 견고하고 가벼운 티타늄으로 케이스를 제작하고 베젤은 세라믹 대신 알루미늄을 적용해 빈티지한 디자인으로 완성했다.
제임스 본드의 역할이 대신 말해주듯, 씨마스터는 군용 시계의 역사와 깊게 연결된 모델로, 방수 성능과 내구성이라는 실용적 특성을 바탕으로 ‘임무 수행’을 전제로 설계된 시계다. 007 시리즈에서 씨마스터는 단순히 영국 신사의 우아함을 상징하지 않는다. 국가와 개인, 감정과 임무 사이의 긴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본드는 늘 세련된 턱시도를 입고 있지만, 그의 손목에 채워진 씨마스터는 언제든 전투 상황으로 전환 가능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씨마스터는 첨단 기술과 클래식 디자인의 균형을 통해, 현대적 스파이 캐릭터가 요구받는 이중성을 구현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철함, 그러나 인간적인 고독을 품은 인물. 씨마스터는 그 이중적 정체성을 조용히 설명한다.
인터스텔라 × 해밀턴 ‘카키’


<인터스텔라>에서 시간은 더 이상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상대성 이론과 중력의 왜곡 속에서 시간은 늘어지고, 뒤틀리며, 인간의 감정과 충돌한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선택된 해밀턴Hamilton Watch의 ‘카키Khaki’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극도로 절제된 시계다.
카키는 본래 군용 필드 워치에서 출발한 모델로, 생존과 기록을 전제로 한다. 영화 속에서 이 시계는 영화 속 배경이 상징하는 미래 기술의 결정체와는 상반되는, 인간이 끝까지 붙잡고 가는 ‘아날로그적 신뢰’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나사NASA 소속 파일럿인 쿠퍼의 손목에 채워진 ‘카키 에비에이션Khaki Aviation’은 전문 파일럿을 위해 탄생한 타임피스라는 배경을 지닌 워치이며, 지구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과학자 머피의 손목에 채워진 클래식한 군용 시계인 ‘카키 필드Khaki Field’는 우주라는 비인간적 공간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연결 고리다.
특히 딸 머피와의 관계에서 시계는 시간 그 자체를 매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서 카키는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과 기억, 그리고 선택의 증거물에 가깝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의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이 단순한 시계가 감당해야 했던 감정의 무게다.
아메리칸 사이코 × 롤렉스 ‘데이트저스트’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롤렉스Rolex 데이트저스트Datejust는 성공의 상징이자, 동시에 공허의 표식이다. ‘프레지던트 워치President watch’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시계는 전통적으로 권력, 부, 사회적 지위를 의미해왔다. 완벽한 외모와 고급 아파트를 지닌 엘리트 투자 은행가이나 사이코패스로 살인을 일삼는 패트릭 베이트먼의 손목에 채워진 데이트저스트는 그가 얼마나 시스템의 수혜자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앞서 소개했던 영화와 달리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시계는 긍정적 상징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벽하게 관리된 외형과 달리, 내부가 비어 있는 인물의 실체를 드러내는 장치다.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롤렉스의 과시적인 면모는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고 레스토랑 예약 순위에 집착하는 베이트먼의 강박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시간마저 소유하려는 태도, 성공을 일정한 스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까지, 롤렉스의 데이트저스트는 이 영화에서 198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욕망 구조를 응축한 오브제로 작동한다.
르망 × 태그호이어 ‘모나코’


현 시대 가장 뛰어난 드라이버로 평가받는 막스 베르스타펜Max Verstappen의 업적이 빛나는 2016년부터 오라클 레드불 레이싱 포뮬러 1Oracle Red Bull Racing Formula 1의 공식 파트너이자 F1의 공식 타임키퍼, 태그호이어Tag Heuer. 모터 스포츠의 심볼처럼 여겨지는 태그호이어에게 모터스포츠 영화 <르망>과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고, 1960-70년대 모터레이싱 문화의 아이콘인 태그호이어 모나코Monaco는 1971년, <르망>을 통해 전설이 되었다. 당시 반항의 상징이었던 할리우드 아이콘,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의 손목 위에 얹힌 사각형 케이스의 크로노그래프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모나코는 정통성과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1969년 탄생한 ‘태그호이어 모나코’는 둥근 시계가 지배하던 시대에 사각형 케이스를 선택했고, 왼쪽 크라운이라는 비대칭 구조를 통해 속도 중심적 사고를 시각화했다. 스티브 맥퀸의 선택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된 이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의 워치는 영화 속 레이서 캐릭터가 지닌 태도, 즉 규칙의 경계를 넘나들며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과 정확히 맞물린다. 이 시계는 레이싱의 낭만, 육체적 감각, 그리고 아날로그 시대의 속도 미학을 대변한다. 모나코가 오늘날까지 컬트적 지위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문장이 되었고, 2024년 12월, 소더비에 스티브 맥퀸이 착용했던 호이어 모나코 레퍼런스 1133BHeuer Monaco Reference 1133B가 경매에 오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