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한밤과 아침 사이, 런던 하프 문

런던의 남동쪽, 영국적 색채를 품은 헤르네 힐. 이곳에 자리한 호텔 하프 문에는 활기 넘치는 펍의 저녁과 고요한 아침의 햇살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런던의 한밤과 아침 사이, 런던 하프 문

런던의 남동쪽, 영국적 색채를 품은 헤르네 힐. 이곳에 자리한 호텔 하프 문에는 활기 넘치는 펍의 저녁과 고요한 아침의 햇살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런던의 한밤과 아침 사이, 런던 하프 문

런던의 남동쪽, 영국적 색채를 품은 헤르네 힐. 이곳에 자리한 호텔 하프 문에는 활기 넘치는 펍의 저녁과 고요한 아침의 햇살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밤과 아침의 경계에 머무는 동안, 도시는 여행자에게 잠시 다른 얼굴을 내어준다. 하프 문에서의 하룻밤은 런던이라는 거대한 이름보다, 한 동네의 시간에 가까웠다.

겨울로 기울어진 런던의 남쪽

ⒸSunyoung Park

런던의 11월은 가을이라기보다는 이미 겨울 쪽으로 기울어 있다. 느닷없이 차오르는, 습하고 두꺼운 안개 속에서 빨간 이층 버스를 따라 데구르 굴러가는 낙엽을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길을 잃고야 마는 여행자의 운명을 실감하게 된다. 게다가 서둘러 찾아오는 저녁 무렵의 회귀적인 정서는 낯선 도시에서조차 익숙한 동네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낸다. 빅토리아역으로 가 사우스이스턴Southeastern 기차에 오른다. 지하철이 아닌 열차를 타는 행위는 어딘가 더 문학적인 기분을 준다. 런던 중심지에서 남동쪽으로 벗어난 곳, 헤르네 힐Herne Hill이라는 동네가 내가 머무는 곳이다. 런던에 오래 살았던 친구는 내가 이곳에서 지낸다고 하자 ‘글쎄, 그 동네에 어떤 특별한 게 있어?’라고 의아해하며 되묻는다. 특별한 게 없어서 끌렸다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대답이었다.

ⒸThe Half Moon

호텔 하프 문The Half Moon. 하프 문은 호텔 이름이기 이전에 1845년에 문을 연, 헤르네 힐의 대표적인 펍 앤 레스토랑이다. 영국에서 펍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집 밖의 또 다른 응접실이자, 때로는 창의적인 서재에 가깝다. 약속하지 않아도 늦은 저녁이면 삼삼오오 몰려드는 동네 사람들끼리 인생 잡담이나 시대의 소문을 늘어놓던, 일종의 연대의 장소인 것이다. 동네 초입의 가장 번화한 길목에 있는 하프 문은 외관부터 빅토리안 런던의 자존심을 풍긴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은 거리의 모서리를 단단하게 붙잡고 서 있고, 크림색 석재로 다듬어진 아치형 창과 장식 몰딩은 건물의 중심을 또렷이 드러낸다. 정면 상단에 새겨진 ‘THE HALF MOON’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단순한 상호가 아니라 동네의 역사 그 자체였음을 암시한다. 오른쪽으로 솟은 탑 모양 지붕은 건물에 연극성을 더해, 이곳에서 수많은 저녁과 대화가 오갔을 시간을 조용히 증언한다.

펍 위의 오래된 방

ⒸThe Half Moon

하프 문이 호텔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몇 년 전, 어느 영국 매거진의 작은 기사 한 귀퉁이에서였다.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에 관한 글이었을 것이다. 딜런 토머스는 남런던에 살던 친구를 만나러 이 동네에 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 펍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근처 밀크우드 로드Milkwood Road에 머물던 시절, 약속이 끝나고 돌아가기 전이든 혹은 만남이 시작되기 전이든, 그는 늘 하프 문의 문을 밀고 들어와 술잔을 앞에 두었다는 것이다. 기사 끄트머리에 슬쩍 흘려놓은 단서를 핀셋처럼 집어 올려, 언젠가의 여정에 끼워 넣는 방식. 늘 나를 이끌고 매료시키는 건 이런 절묘한 우연의 감각이다. 이미 시끌벅적해진 펍 안을 가로지르며, 딜런 토머스가 앉았을 자리를 잠시 상상해 본다. 바에 기대었을 수도 있고, 창가 쪽 어두운 테이블이었을지도 모른다. 손때 묻은 의자와 오래된 나무 테이블 앞에서 그는 문장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날의 대화를 취기와 함께 흘려보냈을까. 술과 말의 소음을 남기고 계단을 또각또각 오르며, 이제는 내가 이 장소의 밤을 맡게 되었다는 기분이 스친다.

객실이 12개뿐인 호텔 하프 문은 펍 2층에 있다. 런던은 파리와 함께 전 세계 대도시 중에서도 호텔의 수와 타입별 옵션이 가장 많은 곳이다. 17~18세기 유럽 최대의 상업 중심지였던 런던은 엄청난 숙박 수요로 인해 이미 당대에 숙박업이 발달했다. 펍앤인Pub&Inn, 비앤비B&B라는 표현에서 보듯, 술을 마시러 왔다가 묵어 가거나 거처가 필요한 외지인을 재워주던 문화가 호스피탈리티의 출발이라는 말은 일리가 있으면서도 어딘가 문학적이다. 이틀의 밤은 가장 넓은 스위트 룸에서 보냈다. 건물 모서리 부분의 아치형 창을 통해 헤르네 힐의 교차로 풍경이 마치 마을의 등대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영국 특유의 장식적인 몰딩, 자꾸만 창가로 오라 손짓하는 노란색 암체어, 이와 보색을 맞춘 듯한 네이비 소파. 무엇보다 창의 중간쯤에 걸린 넷 커튼은 정감 어린 유럽식 장면을 완성한다. 벽난로 위의 작은 거울과 오래된 옷장,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까지. 이 방은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은 집의 얼굴을 하고 있다.

ⒸSunyoung Park

어떤 호텔 혹은 특정 룸을 선택하는 요소는 무척 사소하다. 이 스위트 룸에서는 침대 헤드보드 바로 뒤에 욕조가 놓여 있는 풍경 때문이었다. 침대와 욕실 사이에 굳이 경계를 두지 않은 그 구조가 눈에 밟혔다. 하루의 가장 사적인 행위를 그대로 방 안으로 끌어들인 배치. 몸을 눕히는 자리와 몸을 씻는 자리가 맞닿아 있다는 건 어쩐지 지나치게 솔직하고, 그래서 조금은 로맨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누우면 긴 여행의 국면이 이 순간을 기점으로 달라질 것만 같았다. 침대에서 몇 걸음 옮기면 바로 욕조에 닿고, 물방울을 묻힌 채 침대로 돌아오는 동선은 잠과 각성, 밤과 아침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밤을 건너온 동네 공원

ⒸThe Half Moon

새벽 버스가 서서히 도로를 미끄러져 가는 소리가 부드럽게 잠을 깨웠다.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천천히 지나간다. 일어나 어제의 일기를 절반쯤 쓰다가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밤이면 웃음과 잔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을 펍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져 있었다. 전날의 열기를 기억하는 건 테이블 위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메뉴판뿐이었다. 조식은 바로 그 펍 한켠에서 차려졌다. 시리얼과 과일, 따뜻한 포리지부터 풀 잉글리시 브랙퍼스트까지 메뉴는 푸짐하다. 해시브라운과 베이크드 빈, 소시지와 베이컨이 한 접시에 올라가는 영국식 아침은 늘 그렇듯 성실하지만, 나의 아침이 감당하기에는 다소 무거웠다. 반의반도 비우지 못한 채, 겨우 티 한 잔만 가득 마셨다.

숙소에서 몇 분만 걸으면 브록웰 공원Brockwell Park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이른 시간의 공원에는 개를 산책시키는 이웃들과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느슨한 간격을 두고 흩어져 있다. 언덕 위로 올라서니 남런던의 지붕들이 낮게 펼쳐지고, 도시의 하루가 조용히 시작된다. 관광지의 목록에는 없는, 지극히 런던다운 아침이다. 어제의 겨울 같던 기색은 사라지고 노란 잎을 절반쯤 남겨둔 단풍나무 사이로 화창한 빛이 머물고 있었다. 하프 문이 아니었다면 헤르네 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지나쳤을 것이다. 여행의 만족은 종종 목적지가 아니라, 이렇게 우연히 귀속된 풍경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에 완성된다.

01

Prologue 수필이 되는 밤

02

구름 속에 머문 시간, 도쿄 친잔소

03

뾰족한 지붕들 아래 숨겨진 집, 안트베르펜 줄리앙

04

런던의 한밤과 아침 사이, 런던 하프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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