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한복판, 시간이 쌓인 클래식 호텔이 있다. 구름 속에 잠긴 정원, 글이 써지는 방, 그리고 마음을 스치는 정서. 호텔 친잔소에서만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이 기다린다.
왜 나는 이 호텔을 잊지 못할까


공기의 온도가 낮아졌음을 느낀다. 어깨는 조금 움츠러들었고, 시야는 단풍의 막바지 화려한 색을 즐기느라 분주하다.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과 비등해지는 기억 어딘가에 호텔 친잔소Hotel Chinzanso가 있다. 나에게 호텔은 여행지의 숙소가 아니라 먼 도시에서의 임시거처로 그 의미가 증폭된다. 여행지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뿐만 아니라 긴장과 피로, 상기된 감정과 의욕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나와 모종의 ‘관계를 이루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겐 호텔에서의 모든 기억, 냄새와 촉감, 소리의 질감 같은 것이 다른 여행의 장소들보다 더욱 또렷하다. 와세다 대학이 멀지 않은 도쿄 분쿄구文京区에 있는 호텔 친잔소를 떠올리면 불그스름한 주조가 선연하다. 붉은 벽돌과 타일이 촘촘히 덮인 강건한 외벽. 그 벽에 반사되어 뻗어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객실 한 귀퉁이를 붉은 적막으로 물들였다. 게다가 ‘동백나무가 우거진 언덕 위의 별장’을 뜻하는 친잔소椿山荘라는 이름이 영롱한 동백의 빨간 봉오리를 몰고 오는 것이다.

친잔소는 도쿄에서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품위 있는 클래식 호텔의 전형이다. 1992년 포시즌스 친잔소 도쿄로 문을 열고 화려하게 한 시절을 보낸 후, 2013년 호텔 친잔소라는 독자 브랜드로 새 단장을 하기에 이른다. 다른 호텔들처럼 초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하거나 시대의 취향에 따라 경량화된 이미지로 변모하지 않고, 자신이 쌓아온 시간의 두께를 그대로 지켜낸 채 조용히 현재를 이어가고 있다. 에지 넘치는 디자인 호텔도 좋지만, 오래된 호텔이 살아가는 방식은 유에서 만들어낸 유로 존속하는 전통이 느껴진다. 그런 이유로 친잔소가 내게는 유독 애틋하고 이곳에 머무는 건 ‘오래 알고 지낸 곳을 다시 확인하는 일’처럼 다정하다.
글이 써지는 방, 숨겨진 겨울 정원

627호, 디럭스 트윈 가든뷰 룸에 들어섰다. 베이지빛 카펫이 깔린 객실은 전형적인 사각형이 아닌 각이 독특한 사다리꼴이다. 연극적으로 놓여 있는 두 개의 민트색 암체어, TV와 미니바를 숨긴 높다란 마호가니 캐비닛, 유려한 곡선 다리를 가진 네오클래식 풍의 책상까지. 최근의 호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클래식 가구들의 절묘한 배치다. 오래된 호텔 가구에서만 느껴지는 단정한 곡선과 짙은 나무의 질감이 서로 겹치며 공간의 깊이를 만든다. 꽃무늬가 요동치는 커튼은 장미와 덩굴패턴을 따라 늘어지며 화려한 터치를 더한다.



삼각으로 솟은 페디먼트 헤드보드가 달린 침대 곁엔 시누아즈리풍Chinoiserie* 도자기 램프가 빛을 노오랗게 띄운다. 이 모든 요소가 방 전체를 과하지 않게 장식하면서, 마치 오래된 문장부호처럼 객실의 고요를 꿰어 내는 풍경. 그 자체로 완성된 작은 무대 같은 방은 글 쓰는 이를 자극한다. 그야말로 글이 절로 써지는 낮과 밤을 만날 것만 같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예술 양식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 요소를 유럽식 미감과 해석으로 재구성한 오리엔탈리즘 계열의 미술·디자인 양식이다. 도자기, 가구, 벽지, 섬유, 회화, 실내장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으며, 실제 동양 문화의 재현이 아니라 유럽인이 상상한 ‘동양적 이미지’를 장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

걸음을 절로 이끄는 정면의 통창 밖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이 펼쳐졌다. 도쿄의 도심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활한 자연이 호텔 뒤편에 숨어있는 것이었다. 누그러진 초록과 겨울 녘의 붉은 잎들 사이로 짙은 침엽수가 윤곽을 그리고 그 뒤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숲의 그림자가 누워있다. 언덕 지형을 가진 숲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친잔소의 백미는 호텔 내에 이 고즈넉한 정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1878년 메이지 시대 정치인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이곳에 저택을 세운 역사와 맞닿아 있다. 동백나무가 많아 츠바키야마椿山*라는 이름이 붙여진 정원은 당시 도쿄 제일의 조경사 이와모토 가쓰고로가 단장하며 당시 정치인, 문인들에게 명원으로 손꼽혔다. 이곳에 일반인들이 본격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건 1952년 가든 레스토랑 친잔소가 문을 열면서였는데 결혼식과 성대한 연회의 명소로 도쿄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만 그루의 수목을 심어 도심의 오아시스로 자리매김 한것도 이 무렵부터다. 객실에서는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이지만 직접 나가 산책을 하면 꽤 여유로운 시간을 필요로할만큼 넓은 부지다. 여름이면 반딧불이 빛이 피어나는 벤케이바시 다리, 수십 개의 에도시대 석상들, 표주박 모양으로 굽이치는 유스이치 연못, 14세기 가마쿠라에서 만들어진 석등, 히로시마의 절에서 옮겨온 12세기의 삼중탑.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파생한 물리적 궤적을 헤매다가 문득 도쿄의 겨울 추위가 엄습했을 때, 가지치기를 하고 있던 중년직원이 ‘사무이데스카?(寒いですか?: 추우십니까?)라고 물어왔다. 그 문장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춥냐는 물음으로 직감한 나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츠바키야마椿山: 동백나무 숲


구름 속에 사라지는 나, 친잔소

친잔소의 전 객실과 정원을 모두 아우르는 즐거운 경험 하나가 더 있다. 시간마다 두 번씩 정원을 수증기로 가득 채우는 ‘도쿄 씨 오브 클라우즈Tokyo Sea of Clouds’가 그것이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인공 안개 속에서 목조탑과 연못, 나무들이 아스라히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안개 속에서 잠시 사라지는 자신을 느끼는 몇 분간, 키 큰 나무가 뻗은 가지, 폭포, 천년된 목조탑의 선들이 모호하게 연결되며 하나의 거대한 수묵화가 펼쳐진다. 밤 10시 10분이 되면 마지막 클라우드를 보기 위해 투숙객들과 레스토랑 손님들이 언덕 아래로 모인다. 천천히 안개가 차오르면서 수 천개의 불빛 씨앗들만이 별처럼 빛난다. 터져 나오는 작은 탄성마저도 고요 속에 스며든다. 정원에서 보는 것도 장관이지만, 객실에서 내려다보는 클라우즈는 자연이 흘러가는 형국처럼 스펙터클하다. 스위스 실스마리아의 산맥을 굽이굽이 흘러가는 말로야 스네이크 구름처럼.

이틀을 머무는 동안 너무 많은 느낌과 감정이 스쳐 갔지만, 가장 진한 기억은 호텔과 작별하던 그 순간이었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친잔소를 떠나던 아침, 짐을 실은 뒤 택시가 천천히 출발하자 입구의 직원 둘이 손을 모으고 공손한 인사를 했다. 짧은 목례로 답한 내가 무색하게 그들은 그대로 허리를 숙인 채 멀어져가는 나를 배웅했다. 끝내 고개를 든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손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음을 전한다는 것이 진정한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의 의미일까? 친잔소가 특별한 이유는 아마 ‘좋음’을 넘어서, 자꾸만 마음과 기억을 건드리는 알 수 없는 정서에 있는 것 같다.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 상대의 요구를 말로 듣기 전에 먼저 헤아려 실천하는 일본식 무조건적 환대의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