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안트베르펜은 ‘뾰족한 지붕들의 도시’로 각인된다. 붉은 벽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중세 플랑드르의 건축이 좁은 골목을 따라 이어진다. 비슷한 높이의 붉은 건물들은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다가 마침내 꼭대기에서 뾰족하게 솟아오른다. 수많은 뾰족함이 앤트워프 하늘을 가득 채운다. 그 옛날 무성했을 상인들의 목소리, 길드 하우스가 늘어선 광장, 굽이치는 스헬데 강이 만들어낸 구시가지에 서면 누구나 저마다의 문장을 짓느라 여념이 없다. 돌바닥의 울림과 갑작스레 솟아오르는 첨탑들. 사랑스러운 피터 브뤼겔의 그림 속 풍경이 겹치는 시공을 초월한 장면이다.
작은 호텔, 오래된 태도

2년 만에 다시 벨기에의 수도 안트베르펜Antwerp를 찾은 건 고풍스럽고도 정다운 ‘호텔 줄리앙HOTEL JULIEN’ 때문이다. 정답다는 말은 21개의 객실 규모가 지닌 친밀감에서 비롯된다. 호텔이라기보단 오랜 시간 누군가 애정으로 가꿔온 집 같은 분위기다. 2004년 문을 연 호텔 줄리앙은 ‘부티크 호텔의 시초’로 불리며, 작은 도시 안트베르펜에서도 독자적인 호스피탈리티 신이 펼쳐질 수 있음을 증명해 왔다. 그리고 2025년, 벨기에 디자이너 듀오 피터 아이빈스Pieter Ivens와 배아 몬바에르스 Bea Mombaers의 손을 거쳐 조심스럽게 리노베이션을 마쳤다. 이들의 작업은 새로움을 드러내기보다, 이미 이곳에 쌓여 있던 시간의 결을 다시 읽고 정돈하는 데 주력했다. 구조를 바꾸기보다는 빛과 재료, 가구의 밀도를 조율하며 공간의 성격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호텔 줄리앙을 설립한 무슈 반 훌Mouche Van Hool의 애초 구상은 분명했다. “특별한 집 같은 작은 럭셔리 호텔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친한 친구의 집에 놀러 온 듯 친밀하고 편안한 온기가 스며드는 분위기를 줄리앙에 담았죠. 투숙객들에게 숨겨져 있던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었거든요.” 이번 리노베이션은 이 초창기 철학을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오늘의 언어로 차분히 번역해 낸 결과처럼 느껴진다.

시간으로 지은 곳

1872년 작 <플랜더스의 개>에서 네로와 파트라슈가 나란히 마지막을 맞이한 곳,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여전히 걸려있는 성모마리아 성당. 그로엔 광장의 활기를 살짝 비켜선 좁은 골목에 호텔 줄리앙이 자리한다. 벨을 눌러야만 열리는 문을 밀고 들어서자,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장소에 도착했을 때의 소박한 감격이 밀려온다. 새하얗고 단정한 선과 면, 느긋한 베이지 톤 가구와 패브릭이 공간을 우아하게 채운다. 데스크와 의자 세 개가 놓인 리셉션은 흡사 창의적인 디자이너의 사적인 오피스처럼 느껴진다. 직원은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며 차분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들뜨거나 과한 요소는 없고, 모든 것이 원래 그랬던 듯 자연스러운 흐름과 공기가 부유한다. 리노베이션 이후에도 줄리앙이 새 호텔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체크인을 마치며 유리문 너머 햇살 가득한 중정을 바라본다.

건물은 16세기의 타운하우스와 18세기 신고전주의 건물이 연결된 구조다. 두 채가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생긴 중정이 호텔에 은밀함을 더하고 내부를 밝힌다. 한때 경매 하우스였고, 더 오래전엔 고아원과 종교시설로 쓰였다는 구전 같은 이야기는 장소에 깃든 정서를 더욱 깊게 만든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건물들이 하나의 집으로 묶이면서,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층위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래서일까, 줄리앙에 머무는 일은 단순한 숙박이 아니라 잠시 과거의 시간 속에 몸을 맡기는 경험처럼 느껴진다.



키를 받아 객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없지만 고풍스러운 나선형 계단이 있다. 무거운 짐은 직원이 잠시 뒤 방 앞으로 옮겨다 주었다. 순백의 베드, 문 대신 커튼이 매달린 옷장, 커다란 두 개의 창. 장식을 덜고 기능에 충실한 방은 검박함과 느긋함이 섬세하게 균형을 이룬다. 옛 건물을 활용한 호텔답게 객실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한 층이나 두 층쯤 더 올라가면 다락방 같은 싱글룸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내게 배정된 객실이 더욱 애틋해지고, 짧은 체류에도 ‘내 공간’이라는 애착이 강해진다.
머무름이 취향이 되는 순간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갔다. 호텔의 구심인 로비 층은 탐험의 즐거움이 가장 풍부한 곳이다. 객실이 편안함과 쾌적함에 충실하다면, 호텔이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취향과 의지는 퍼블릭 스페이스에서 과감하게 펼쳐낸다. 아르네 야콥센의 레드 에그체어와 붉은 벽으로 물들어있는 강렬한 바. 안쪽으로는 임스의 조각같은 라 셰즈 체어가 놓인 커다란 룸이 하나 있다. 두 명의 투숙객이 업무에 여념이 없던 그 공간은 업무나 비즈니스 미팅을 위한 유연한 워크룸이다. 복도 끝, 길쪽으로 면한 레스토랑은 오후의 빛으로만 충만했다. 비코 마지스트레티의 목가적인 카리마테 체어가 일렬로 놓인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분홍빛 튤립이 싱그럽게 피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의 바 테이블에 잠시 기대어 기대되는 내일 아침의 조식 메뉴도 슬쩍 읽어보았다.

음악에 이끌리듯 중정 쪽으로 걸어 나갔다. 무엇보다 줄리앙의 백미는 이 중정과 맞닿은 라운지다. 호텔 특유의 나직한 소음과 고요가 교차하는 곳이며, 이따금 ‘함께 머물고 있다’라는 연대로 맺어진 다른 투숙객들과 마주침이 허용되는 공간이다. 나처럼 이 호텔을 선택한 다른 누군가와 만나는 것, 때로는 눈인사를 나누거나 몇 마디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게 되는 자리. 라운지에 머무는 시간이 즐겁고 설레는 까닭이다. 느슨하게 놓인 소파 사이로 둥근 테이블과 작은 스툴들이 간격을 둔 채 숨을 고른다. 라운지 한쪽에는 오래된 벽난로가 중심처럼 자리 잡고 있다. 불이 피워지지 않은 날에도 벽난로는 충분히 따뜻하다. 검게 그을린 벽돌과 묵직한 나무 프레임, 거울 속에는 천장의 장식과 꽃이 꽂힌 테이블, 그리고 잠시 멈춰 선 내 모습이 겹친다.
섬세하게 골라둔 책들, 게다가 흐르는 음악은 계속 그곳이 머무르게 한다. 체크인하던 순간부터 음악이 귀에 명료하게 들어왔다. 호텔의 플레이리스트야말로 분위기의 흐름을 매끄럽게 만드는 핵심이다. 줄리앙에서는 한 곡 한 곡이 더 첨예하게 이어가는 듯했다. 결국 앱을 켜, 휴대폰을 스피커에 갖다 대고 곡 제목과 아티스트를 찾아냈다. Dabeull의 〈Don’t Forget It〉, Thunder cat의 〈A Fan’s Mail〉 같은 노래들이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됐다. 그 리스트는 라운지에서 보낸 오후의 공기와 소파의 온도, 벽난로 앞에 맴돌던 느린 침묵까지 재생한다. 호텔에 머문다는 것은 단지 잠을 자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취향의 세계를 한 걸음씩 건너며 나 자신의 감각을 시험하고 확장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줄리앙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여행의 바깥이 아니라 나의 안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