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매혹하는 대중문화의 탄생지, 미국 LA의 다운타운. 도시를 채우는 스카이라인 중 5개의 유리 타워가 시선을 붙든다. 빛을 반사하며 내부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이 건물은 1976년 문을 연 웨스틴 보나벤처 호텔&스위트The Westin Bonaventure Hotel & Suites다. 미국 건축가 존 포트만John Portman이 설계한 이곳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짙게 담아 완성했으며, 거대한 원통형 유리 건물은 등장 당시부터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LA 도심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유지하며 랜드마크 중 하나로 거론되는 곳이다.
원통형 유리에 숨겨진 도시 속의 도시

포트만은 ‘도시 속의 도시City Within a City’라는 철학을 기반으로 건물을 설계했는데, 호텔 내부로 들어서는 과정에서부터 그 의도를 느낄 수 있다. 1985년 바깥 대로와 직접 연결되는 출입구가 생기기 전까지는 호텔에 들어오기 위해 입구로 연결되는 다리를 건너야 등 외부와 직접 닿는 통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심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진입’의 단계를 거치게 함으로써 현실에서 비켜난 세계로 이동시키는 효과를 준 것이다.

브루탈리즘 디자인이 지배하는 로비에 들어서면, 천장까지 시원하게 뚫린 유리창 사이로 빛이 내려앉아 차가운 콘크리트를 감싼다. 단단한 소재가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고, 각 층에서 로비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설계된 돌출형 구조는 이곳의 시그니처로 자리한다. 건물의 외형을 그대로 닮은 원형 유리 엘리베이터 역시 이곳의 상징이다. 포트만은 엘리베이터를 ‘키네틱 조각Kinetic Sculpture’이라고 설명했는데, 단순히 사람을 이동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간을 완성하는 예술 작품임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브루탈리즘이 뒤섞인 풍경은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이런 독보적인 존재감 덕분에 웨스틴 보나벤처 호텔&스위트는 할리우드의 무대로 자주 소환되어 왔다.
액션의 긴장감, SF의 미래적 구조


영화 〈사선에서〉, 〈트루 라이즈〉 등 1990년대부터 영화 속 배경으로 자주 모습을 나타냈는데, 특유의 복합적인 동선과 구조를 활용한 액션 장면에 등장하며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이곳을 유독 즐겨 찾은 감독은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인셉션〉 등에서 공간을 짧게 비췄고, 〈인터스텔라〉에서는 이곳을 미국 항공우주국 NASA의 본거지로 설정해 인상적으로 담아냈다.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 오히려 과거의 건축을 선택함으로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음악의 리듬을 살리는 배경

로비는 미래적인 장면으로 구현되는 반면, 객실 등 내부 공간은 보다 절제된 선과 미니멀한 구조를 드러낸다. 이러한 대비 때문에 공간마다 서로 다른 장면이 녹아든다. 최근에는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며 음악의 본래 감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장소가 됐다.
호텔 구조를 직관적으로 살펴보고 싶다면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와 시저SZA의 ‘luther’ 뮤직비디오가 가장 적절하다. 연출을 맡은 카레나 에반스Karena Evans 감독은 원통형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절제된 구도와 흑백의 화면 연출을 통해 곡이 가진 정서를 시각적으로 끌어냈다. 아이코닉한 엘리베이터와 내부 객실, 건축을 따라 흐르는 계단까지 구조적인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호텔이 ‘미로’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내부 깊숙이 들어갈수록 방향 감각을 잃기 쉽고, 곡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구조는 발길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할리우드의 더욱 매력적인 무대가 됐다. 유려하게 흐르는 곡선, 깔끔하게 떨어지는 직선이 얽히며 미로처럼 섞이는 공간들은 장면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내며 다양한 장르의 배경으로 존재해 왔다.


마룬 5Maroon 5와 블랙핑크 리사의 ‘Priceless’ 역시 미로 같은 로비와 아이코닉한 구조들을 무대로 삼는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유리창을 통해 조망하는 LA 도심의 낮과 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배우 정호연이 출연해 화제였던 더 위켄드The Weeknd의 ‘Out of Time’ 뮤직비디오는 호텔로 향하는 입구 장면에서 시작된다. 외부와 단절을 선언하는 듯한 통로를 지나며 음악이 그리는 세계로 들어선다.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의 ‘BIRDS OF FEATHER’는 실제 호텔에서 촬영됐음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공간과 연출 때문에 마치 분리된 세트장처럼 느껴진다. 감독 에이단 자미리Aidan Zamiri는 찰리 XCXCharli XCX의 ‘Guess’에서 과감한 컬러와 과잉된 시각적 요소를 활용했던 것과 달리, 극도로 단순한 구조를 통해 곡이 지닌 감정에 집중한다. 장식을 덜어낸 공간과 연출이 음악의 흐름에 집중하게 만든다.
최근에는 해리 스타일Harry Styles의 ‘Aperture’ 뮤직비디오가 화제였다. 호텔 곳곳을 가로지르고 오르내리며 달리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공식적으로 촬영지를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화면에 담긴 순간들만으로 만큼 웨스틴 보나벤처 호텔&스위트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상은 오브 페리Aube Perrie감독의 연출과 라이언 헤핑턴 Ryan Heffington의 안무가 초현실적인 움직임을 더하는데, 영화감독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가 연출했던 팻보이 슬림Fatboy Slim의 ‘Weapon Of Choice’ 뮤직비디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내부 공간에서는 깔끔하게 뻗은 미감이 돋보인다면, 중앙 로비에 흐르는 곡선이 함께 하며 영상에 리듬을 더한다. 동선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며 공간 자체가 하나의 시퀀스를 완성한다.

영화와 음악이라는 장르에서 서사를 그리는 무대로 선택해 왔다는 점이 호텔이라는 공간을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시킨다. 촬영을 위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세트가 아닌 실제로 반세기 동안 LA 도심을 지켜 온 실제 호텔이라는 사실은 대중문화의 중심지로서 LA가 가진 매력을 한층 짙게 만든다. 미래지향적인 구조 위에 세월이 덧입혀지면서 내부 곳곳에 남은 1970~1980년대의 레트로함이 더욱 독특하게 진화하고 있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간 것 같다’는 비유가 현실이 되는 곳. 웨스틴 보나벤처 호텔&스위트는 LA의 수많은 호텔과 명소 가운데서도, 새로운 장면을 기다리는 배경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