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은 늘 미래를 말하지만,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가 제시한 것은 오히려 ‘지금’이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화려한 트렌드가 아니라, 패션이 현실과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베트멍에서 패션 시스템을 해킹하던 디자이너는 발렌시아가에서 하우스 규모의 문법을 다시 짰고, 이제 구찌라는 가장 큰 무대에서 또 한 번의 하이 패션의 재정의를 준비하고 있다.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에서 했던 생각들

뎀나 바잘리아의 커리어를 들여다보면, ‘패션 엘리트의 성공 서사’라기보다 현실감각으로 가득한 생존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조지아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전쟁과 이주를 경험해야 했고, 포스트-소비에트 이후를 지나온 그의 배경은 훗날 그의 디자인 전반에 깔린 건조한 유머, 불안정한 긴장감의 토대가 된다.

그가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Royal Academy of Fine Arts Antwerp에서 수학하던 시기, 뎀나는 이미 ‘옷을 잘 만드는 법’보다 패션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무엇을 재현하고 있는가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훗날 〈시스템 매거진System Magazine〉과 나눈 인터뷰에서 이 시절을 회상하며 “당시 패션은 나에게 너무 멀고, 너무 허구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한 바 있다. 동시대 학생들이 이상적인 하우스의 화려한 미감을 동경할 때, 뎀나는 오히려 왜 모두가 같은 것을 욕망하는지, 왜 옷은 현실의 감각과 이렇게 멀어졌는지를 질문했다. 이 질문은 곧 그가 패션을 ‘아름다움의 산업’이 아니라 현실을 비추는 왜곡된 거울로 다루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베트멍, 시스템을 비트는 가장 현실적인 패션




메종 마르지엘라와 루이 비통에서 커리어를 보낸 뎀나 바잘리아는 2014년,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형제인 구람 바잘리아Guram Gvasalia와 함께 베트멍을 공동 설립한다. 그들은 프랑스 파리의 작은 게이바에서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베트멍의 시작을 알렸다. 프랑스어로 ‘옷’이라는 의미를 지닌 브랜드명이 역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 브랜드는 특정한 룩보다는 태도로 기억된다. 오버사이즈 실루엣, 일상복에 가까운 아이템, 때로는 ‘못생김’에 가까운 비례는 런웨이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요소들이었기 때문. 그러나 그 충돌이야말로 뎀나의 목적이었다. 베트멍이 던진 파장은 단지 스트리트웨어의 부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뎀나는 옷만이 아니라 패션이 작동하는 방식에도 권위와 형식을 벗겨냈고, 그것을 콘텐츠처럼 다루었다. 이 접근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선구적인 콘텐츠 마케팅 기법으로 여겨진다.
뎀나 바잘리아는 이렇게 익명성에 가까운 팀 운영, 비전통적인 쇼 장소, 협업의 남용에 가까운 전략 등 전통적인 패션쇼의 형식은 물론 이미지 생산 구조까지 뒤바꿨다. 이를 통해 그가 보여준 것은 새로운 룩이라기보다는 패션이 지금 어떤 시대의 욕망을 재현하는지에 대한 관찰로 해석된다. 2019년 그는 베트멍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난다. 그가 스스로 만든 레이블을 떠났다는 사실은 뎀나의 다음 챕터가 이미 훨씬 더 큰 하우스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키는 사건이었다.
패션에 싫증이 나서 베트멍을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베트멍이 등장한 이후 패션계는 완전히 바뀌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어요.
– <WWD> 인터뷰 중 –
발렌시아가, 반(反) 패션으로 해석된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


2015년, 뎀나는 발렌시아가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당시 발렌시아가는 방향성을 잃은 하우스로 평가받고 있었고, 그의 합류는 파격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발렌시아가에서 뎀나는 베트멍에서 실험하던 언어를 하우스 규모의 럭셔리로 확장한다. 오버사이즈 실루엣, 과장된 숄더, 로고 플레이, 스포츠웨어의 차용은 브랜드의 새로운 문법이 되었다.



뎀나 바잘리아가 개발한 발렌시아가 고프 스니커즈의 계보 ⓒBalenciaga
스피드 러너, 트리플 S, 트랙 트레이너로 이어지는 지저분하고 투박한 스니커즈는 트렌드를 선도했고, 이케아의 쇼핑백을 패러디한 백, 타월 스카프에 이르는 파격적인 시도는 패션 업계 바깥에서도 화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행보 덕에 2017년에는 CFDA 패션 어워즈CFDA Fashion Awards에서 국제상을, 2018년 패션 어워즈Fashion Awards에서 올해의 액세서리 디자이너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화제성뿐 아니라 상업적인 면에서도 인정받았다. 발렌시아가 단독 매출 수치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케어링Kering 그룹의 성장을 주도했다며 긍정적인 내부 평가가 있었던 것.


특히 2021년, 그가 발렌시아가 쿠튀르 라인을 부활시키며 선보인 컬렉션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는 ‘스트리트웨어 디자이너’라는 그를 둘러싼 단편적인 평가에 대한 응답이었고, 동시에 기술, 테일러링, 장인 정신을 통해 자신이 하우스를 다룰 수 있는 디자이너임을 증명했다. 같은 해 조지아의 주라비슈빌리Salome Zourabichvili 대통령이 뎀나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하며 ‘차세대 조지아 창작자들의 본보기’라고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물론 이 시기에는 2022년 광고 캠페인 논란이라는 치명적인 사건도 있었다. 뎀나는 〈보그Vogue〉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에서 잘못된 결정이었다며 책임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도발적인 그의 미학이 브랜드 리스크와 충돌했을 때의 한계를 드러냈고, 이후 그의 컬렉션은 눈에 띄게 절제되고 옷 중심적인 방향으로 이동한다. 발렌시아가 후반부의 뎀나 바잘리아는 더 이상 시스템을 비웃기보다는 시스템 안에서 옷의 힘을 회복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구찌, 다시 가장 큰 무대로


2025년 3월, 케어링은 뎀나 바잘리아를 발렌시아가에서 구찌의 새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하며 7월 초부터 역할을 시작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를 ‘현대 럭셔리를 재정의한 인물’로 평가하며, 구찌의 다음 단계를 이끌 인물로 선택한 것이다. 베트멍에서 시스템을 뒤틀던 사람이, 발렌시아가에서 하우스를 구축한 뒤 구찌에서 무엇을 ‘보여줄지’가 아니라 무엇을 ‘재정의할지’를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발렌시아가의 약 5배가량의 매출을 지닌 구찌는 단지 새로운 스타일이 필요한 브랜드가 아니다. 아이콘과 유산이 이미 너무나 분명한 하우스다. 뎀나의 다음 디자인은 결국, 그 아이콘들을 지금의 현실 언어로 다시 번역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뎀나의 데뷔 컬렉션인 2026 S/S 시즌은 ‘새로운 룩’보다는 ‘새로운 인물의 아카이브’로 시작했다. ‘라 파밀리아La Famiglia’라는 프레임 아래 룩은 초상화처럼 배열되고, 발표 방식 또한 이미지와 필름 중심으로 진행된다. 동시에 플로라, 스트라이프, 뱀부 같은 구찌의 오래된 코드가 다시 호출되었다. 즉 뎀나의 구찌는 전복보다 유산을 다시 정렬하는 방식으로 첫 단계를 밟았다.


이어 발표한 것은 ‘구찌 세대Generation Gucci’라는 이름이 붙은 2026 프리폴 컬렉션이다. 지난 시즌이 ‘집안’의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시야를 한 ‘세대’로 확장한 셈이다. 뎀나 바잘리아가 직접 촬영한 이번 비주얼은 톰 포드가 전성기를 이끌었던 1990년대 구찌의 공기를 환기한다. 섹시하면서도 대담한 테일러링 수트, 몸선을 드러내는 펜슬 스커트, 헤비한 퍼 재킷까지, 구찌 아카이브를 면밀히 되짚고 다시 엮어낸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제 남은 것은 2월, 마침내 공개될 그의 첫 런웨이. 다음 문장이 어떤 실루엣으로 완성될지 기대해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