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션 디자인은 단순한 세트를 넘어 작품의 깊이를 더하는 하나의 캐릭터가 되곤 한다. 등장인물 뒤로 보이는 벽지 하나를 위해 여러 차례 디자인과 테스트를 거친다는 거장 감독의 일화처럼, 배경 역시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최근 1990년대 뉴욕을 정교하게 재현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러브 스토리: 존 F. 케네디 주니어 & 캐롤린 베셋〉을 통해 프로덕션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미학에 집중해 본다.
라이언 머피의 1990년대 뉴욕, 그리고 러브 스토리

FX 제작 드라마 〈러브 스토리: 존 F. 케네디 주니어 & 캐롤린 베셋〉의 공식 포스터 ⒸFX
드라마 〈글리〉,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등 수많은 화제작을 선보여 온 미국의 프로듀서 라이언 머피Ryan Murphy가 새로운 작품으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부터 훌루Hulu에서 방영 중인 FX 제작 드라마 〈러브 스토리: 존 F. 케네디 주니어 & 캐롤린 베셋〉이 그 주인공이다. 국내에서는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매주 금요일 공개되며, 총 9부작 가운데 현재 6부까지 공개된 상태다.

작품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이코닉하고 비극적인 커플, 존 F. 케네디 주니어John F. Kennedy Jr와 캐롤린 베셋-케네디Carolyn Bessette-Kennedy의 삶을 다루기 때문이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그는 1992년, 뉴욕 캘빈 클라인 본사의 홍보 담당자였던 캐롤린 베셋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은 1996년 소규모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 3년 만인 1996년 직접 조종하던 경비행기의 추락 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이 커플은 특히 패션을 비롯한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199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커플로 기억되고 있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사고를 시작으로, 시간을 거슬러 첫 만남부터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 엘리자베스 벨러Elizabeth Beller가 캐롤린의 삶을 다룬 책 〈원스 어폰 어 타임: 캐롤린 베셋-케네디의 매혹적인 삶Once Upon a Time: The Captivating Life of Carolyn Bessette-Kennedy〉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폴 켈리는 무게감 있는 수트와 여유로운 캐주얼룩을 오가고, 사라 피전은 가벼우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FX
캐롤린 베셋은 미니멀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로 1990년대 뉴욕 미니멀리즘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모노톤을 중심으로 한 컬러 팔레트, 심플한 아이템,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이 그녀의 스타일을 완성한다. 드라마에서도 이러한 패션을 훌륭하게 그려, 캐롤린 베셋을 맡은 사라 피전Sarah Pidgeon의 연기와 어우러지며 매력을 극대화한다. 존을 연기한 폴 켈리Paul Kelly와 함께 아이코닉한 커플룩은 물론, 깊은 인상을 남긴 웨딩룩까지 세심하게 되살렸다.
1990년대 뉴욕의 분위기와 미학이 드러나는 것은 패션만이 아니다. 다양한 의상과 그 배경이 되는 공간들 역시 정교하게 구현돼 높은 몰임감을 만든다. 핵심적인 장면을 완성하는 장소들은 서사의 깊이를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 시절 뉴욕이 품은 낭만
프로덕션 디자이너 알렉스 디저랜도Alex DiGerlando와 세트 데코레이터 리디아 마크스Lydia Marks의 감각으로 1990년대 뉴욕이 완성됐다. 두 사람 모두 에미 어워즈Emmy Awards 미술감독 부문 후보에 오른 바 있으며, 2021년 넷플릭스 뮤지컬 영화 〈틱, 틱… 붐!〉에서 이미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해당 작품 역시 199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을 간직한 뉴욕의 다운타운을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알렉스 디저랜도는 영화 〈오션스 8〉, 넷플릭스 드라마 〈매니악〉 등을 통해 개성 강한 시각적 세계를 구축해 왔고, 리디아 마크스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섹스 앤 더 시티 2〉 등에 참여하며 뉴욕 특유의 감각을 탁월하게 담았다. 이전 작품들에서 도시적인 생기가 눈에 띄는 연출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1990년대 뉴욕의 절제되고 세련된 낭만을 그렸다.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집



모두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출시된 것으로, 작품의 시대성을 반영한 부분이다. ⒸFX
결혼 전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거주했던 뉴욕 트라이베카의 아파트는 실제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자료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그 위에 제작진의 상상력을 더해 완성했다. 건물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지만, 1990년대 모습을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 초기 디자인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고. 제작진은 부동산의 매물 자료, 건축 설계도 등을 찾아 구조를 유추하며 윤곽을 잡아갔다. 유리, 콘크리트, 스테인리스 등 소재를 활용해 도시적인 느낌을 강조했고, 당시 유행했던 유리블록도 곳곳에 배치했다. 테이블과 의자 등 가구는 실제로 그가 집을 꾸몄을 시기를 떠올리며 1980~1990년대에 디자인된 제품들로 채웠다.
재클린 케네디의 집



디테일에 집중해 공간을 디자인했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를 테마로 했다. ⒸFX
존 F. 케네디 대통령 사후 케네디 가문의 중심인물로서, 미국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sis는 배우 나오미 왓츠Naomi Watts가 맡아 극의 중반부까지 등장한다. 극 중 재클린 케네디와 딸 캐롤라인 케네디Caroline Kennedy, 그녀의 남편 에드윈 슐로스버그Edwin Schlossberg, 그리고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자주 모이는 재클린 케네디의 집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케네디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는 동시에, 재클린의 취향과 성격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실제로 뉴욕 5번가에 위치한 아파트로, 제작진은 재클린 케네디 사후에 진행됐던 소장품 경매 자료 등을 참고해 내부를 재구성했다.
극 전반에 흐르는 심플한 스타일과 달리 그녀의 집은 미니멀리즘과 거리가 멀다. 장식적이고 고풍스러운 유럽풍 인테리어를 중심으로 꾸며져 다른 장소들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대리석 벽난로, 플로럴 패턴, 프랑스풍 가구 등으로 채워져 풍부한 색과 패턴, 오브제로 가득하다. 이러한 인테리어는 재클린 케네디가 살아온 복잡한 삶과 감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가족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남편을 그리워하며 홀로 춤을 추거나,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극 중반까지 가장 풍부한 색감과 이야기로 채워진 공간이자, 하나의 캐릭터처럼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소다.
뉴욕 캘빈 클라인 본사



극 중 캐롤린 베셋의 중요한 활동 배경으로 등장한다. ⒸFX
주인공 캐롤린 베셋은 집보다는 회사에서 더 자주 등장한다. 뉴욕 캘빈 클라인 본사에서 홍보 담당자로 일했던 실제 배경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다. 제작진에 따르면 다른 곳보다 비교적 수월하게 작업했던 공간이 바로 이 사무실이었다고. 1990년대 뉴욕 패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소인 만큼 브랜드 아카이브에 관련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산업적 소재를 활용한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특징이다. 극에는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이 캐롤린과 함께 일하는 모습 속 사무실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테이블, 의자, 조명은 당시 사용됐던 모델과 동일하게 배치했다. 차분한 색과 간결한 선으로 이루어진 사무실은 일반적인 회사와는 다른 무드를 자아낸다. 벽이나 칸막이로 구분되지 않은 개방적인 구조와 여유로운 책상 배열도 실제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근무했던 사람들은 사무실 자체가 하나의 쇼룸 같았으며, 미니멀리즘하고 패셔너블한 분위기가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작품에서 농담처럼 등장하는 “사무실에는 흰색 난초만 둘 수 있고, 다른 꽃은 모두 금지.”라는 설정 또한 사실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디테일 덕분에 당시 모습을 충실하게 그렸다는 패션 업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뉴욕의 재현


드라마 역시 이곳을 비롯한 뉴욕의 공원과 거리 풍경을 통해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그려냈다. ⒸFX
아직도 뉴욕 곳곳에 남아있는 장소가 많아, 드라마는 마치 1990년대 뉴욕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사실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1990년대에 뉴욕대학교NYU에 재학했던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이 즐겨 찾던, 편안하면서도 낭만적인 레스토랑을 촬영 장소로 선정하기도 했다. 또한 두 주인공이 거주했던 트라이베카 인근의 장소도 적극 활용했다.
미디어 업계 인사들이 자주 찾았던 웨스트 브로드웨이의 ‘오데온The Odeon’과 웨스트 55번가의 ‘마이클스Michael’s’, 패션 업계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레스토랑 ‘인도차이나Indochine’에서도 촬영이 이뤄졌다. 지금은 사라진 장소들 역시 당대 분위기와 극의 미학을 반영하는 데 집중해 새롭게 꾸몄다. 존과 캐롤린이 실제로 평범한 뉴요커처럼 데이트하고 일상을 보냈던 점을 살려 자연스러운 도시의 모습을 화면 속에 담아낸 것이다.
실존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위에 정교한 프로덕션 디자인이 더해져 1990년대 뉴욕의 공기를 설득력 있게 되살려낸 드라마 〈러브 스토리: 존 F. 케네디 주니어 & 캐롤린 베셋〉. 패션과 공간, 실제 로케이션까지 세심하게 재현된 장면들은 아이코닉했던 커플의 서사와 미국의 대중문화를 훌륭히 그려낸다. 그렇게 화면 속 뉴욕은 배경을 넘어, 존 F. 케네디 주니어와 캐롤린 베셋의 삶과 감정을 함께 담아내는 또 하나의 캐릭터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