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딘 알라이아Azzedine Alaïa는 1935년 2월 26일,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Tunis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튀니스 미술학교Tunis Institute of Fine Arts에 들어가 조각을 공부했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재봉 일을 하며 옷의 구조를 익혔다. 인체의 골격과 곡선을 관찰하던 조각 수업은 훗날 그의 디자인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1956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크리스찬 디올의 아틀리에에서 나흘간 일한 뒤, 개인 고객을 위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1958년에는 기 라로슈Guy Laroche에 합류해 쿠튀르 기술을 익혔다. 오랜 시간 파리 사교계 여성들의 맞춤복을 제작하며 명성을 쌓은 그는 1982년 뉴욕의 베르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에서 첫 레디투웨어 컬렉션을 선보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패션 하우스 ‘메종 알라이아Maison Alaïa’를 설립한 뒤, 몸을 빈틈없이 감싸는 정교한 재단으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조형 언어를 완성했다.

내가 끊임없이 몰두하는 것은 여성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다.
그 마음으로 만든 옷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 아제딘 알라이아(Azzedine Alaïa)
몸의 선을 조각한 쿠튀리에

알라이아가 평생 천착한 대상은 여성의 몸이었다. 그는 종이에 스케치를 그리기보다 마네킹과 모델의 신체 위에서 직접 천을 자르고 다듬는 방식을 선호했다. 모델에게 걷고 앉게 하며 옷이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폈고, 피부처럼 밀착하면서도 몸의 곡선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실루엣을 완성했다. 그의 옷이 흔히 ‘입는 조각’에 비유되는 이유다. ‘밀착의 왕King of Cling’, ‘타이트의 거인Titan of Tight’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그가 원한 것은 몸을 억누르거나 감추는 옷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신체의 선을 읽고, 그 안에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드러내는 옷이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강렬한 개성을 지닌 여성들이 있었다.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와 마돈나Madonna, 미셸 오바마Michelle Obama, 레이디 가가Lady Gaga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여성들이 알라이아의 옷을 선택했다. 그중에서도 나오미 캠벨Naomi Campbell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16세 무렵 알라이아와 인연을 맺은 캠벨은 그를 ‘파파Papa’라고 불렀고, 오랜 시간 가족과도 같은 관계를 이어갔다. 알라이아에게 모델과 고객은 옷을 보여주는 대상이 아니라 창작을 함께 완성하는 동료에 가까웠다. 여성의 몸과 움직임에서 출발한 옷은 다시 그들의 태도와 에너지를 만나 비로소 생명력을 얻었다.

마레에 있는 나의 집에 재단을 설립하고 싶다.
내 아카이브뿐 아니라 패션사와 예술, 디자인에 걸쳐
수집해온 작품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 아제딘 알라이아(Azzedine Alaïa)
알라이아는 공식 패션 캘린더가 요구하는 속도에도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시즌에 맞춰 옷을 내놓기보다, 충분히 완성됐다고 판단했을 때만 컬렉션을 공개했다. 한 벌의 옷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믿었기 때문이다. 2017년 11월 18일,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옷이 좀처럼 낡아 보이지 않는 것은, 애초에 한 시즌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집으로 남긴 또 하나의 유산

알라이아에게는 집요한 수집가의 면모도 있었다. 1960년대 말, 그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óbal Balenciaga의 메종이 문을 닫자 사라질 위기에 놓인 의상 일부를 구입했고, 이후 폴 푸아레Paul Poiret, 마들렌 비오네Madeleine Vionnet, 마담 그레Madame Grès,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등 패션 거장의 의상부터 미술과 사진, 가구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수집의 영역을 넓혀갔다.

2007년에는 오랜 친구인 갤러리스트 카를라 소차니Carla Sozzani, 화가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던 크리스토프 폰 바이헤Christoph von Weyhe와 함께 아제딘 알라이아 협회를 설립했다. 자신의 작업과 평생 모은 컬렉션을 보존하고 연구해 다음 세대와 나누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작업과 평생 모은 컬렉션을 보존하고 연구해 다음 세대와 나누기 위해서였다. 협회는 이후 아제딘 알라이아 재단Fondation Azzedine Alaïa으로 이어졌으며, 202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익기관 지위를 인정받았다. 현재 재단이 소장한 컬렉션은 3만 5,000점이 넘는다. 알라이아의 의상과 드로잉, 패턴뿐 아니라 패션사적으로 중요한 옷과 예술·디자인 작품을 아우른다. 한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취향에서 시작된 수집은 이제 패션의 역사를 읽고 연구하는 살아 있는 아카이브가 됐다.
삶과 창작이 포개진 집

파리 마레 지구의 번화한 거리에서 한 걸음 벗어나 커다란 문을 지나면, 식물이 우거진 중정과 유리 지붕으로 덮인 넓은 홀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 재단의 메인 갤러리로 사용되는 이곳은 한때 알라이아가 패션쇼를 열고 사람들을 맞이하던 집의 중심이었다. 옷이 탄생한 아틀리에와 피팅 룸, 일상을 보낸 거실, 친구들과 긴 식사를 나누던 주방이 한 건물 안에 이어져 있다. 삶과 작업, 창작과 환대가 뚜렷한 경계 없이 맞닿아 있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2층에는 알라이아의 가장 사적인 창작 공간이 남아 있다. 2023년 처음 대중에게 공개된 그의 아틀리에다. 둥근 창 너머로 작업 중이던 드레스와 미완성 의상, 천과 종이 패턴, 자와 가위, 핀이 빼곡한 방이 펼쳐진다. 과거를 재현해 꾸민 세트가 아니라, 알라이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듯 시간이 멈춰 있는 실제 작업실이다. 그는 손님들과의 저녁 식사가 끝나면 다시 작업대로 돌아가 새벽까지 옷을 만들었다. 곁의 피팅룸에서는 모델을 걷고 앉게 하며 옷이 몸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르는지 살폈다. 알라이아의 조각적인 드레스는 순간적인 영감이 아니라, 여성의 몸 위에서 핀을 수없이 꽂고 풀어낸 오랜 시간의 결과였다.
아프리카의 기억을 꺼내다

현재 메인 갤러리에서는 기획전 《아제딘 알라이아와 아프리카Azzedine Alaïa and Africa》가 열리고 있다. 알라이아는 프랑스 오트 쿠튀르의 중심에서 활동했지만, 어린 시절 떠나온 튀니지와 아프리카 대륙의 빛과 색, 건축과 소재는 그의 작업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전시는 튀니스 건축의 격자형 차양인 마슈라비야와 알라이아의 오픈워크 패턴을 연결한다. 빛과 시선을 동시에 통과시키는 건축적 격자는 흰색 면 소재의 스커트와 셔츠에 뚫린 구멍으로 이어져, 몸을 드러냈다가 다시 감춘다. 라피아와 노끈, 조개와 카우리 셸을 활용한 1980년대 후반의 작업과 이집트의 미라와 붕대에서 착안한 밴디지 드레스도 함께 소개된다.


의상 사이에는 알라이아의 오랜 친구이자 예술가인 ‘크리스 루스Kris Ruhs’의 회화가 놓여 패션과 미술이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전시는 그의 디자인을 출생지라는 단일한 배경으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각인된 빛과 장식, 건축과 재료의 기억이 수십 년의 시간을 지나 어떻게 재단과 실루엣으로 되돌아왔는지를 살핀다.


위층에서는 《피터 비어드와 아제딘 알라이아: 우정의 여정Peter Beard and Azzedine Alaïa: A Journey of Friendship》이 이어진다. 1996년 4월 알라이아는 케냐에 머물던 사진가이자 오랜 친구 피터 비어드Peter Beard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투르카나 지역에서 케냐의 반유목민족 ‘삼부루Samburu’ 공동체와 며칠을 보냈고, 알라이아는 현장에서 천을 몸에 두르며 즉흥적으로 옷을 만들기도 했다. 피터 비어드의 사진은 여행과 우정, 낯선 장소에서 이어진 조용한 관찰이 알라이아의 기억에 남긴 장면을 되짚는다. 두 전시 모두 2027년 4월 1일까지 열린다.
알라이아가 사랑한 것들

전시실을 모두 돌아본 뒤 중정으로 내려오면 알라이아의 세계는 책과 식탁으로 이어진다. 서점에는 패션과 미술, 디자인, 건축, 사진, 문학에 관한 책을 비롯해 재단의 전시 도록과 희귀본, 한정판이 놓여 있다. 장 프루베Jean prouvé의 책장과 테이블, 세르주 무이Serge Mouille의 샹들리에, 장 루아예르Jean Royère의 벽등과 청동 문, 줄리언 슈나벨Julian Schnabel이 그린 알라이아의 초상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전시실 같은 풍경을 이룬다. 중정의 카페 레스토랑 ‘르 아Le A’는 알라이아의 환대 문화를 잇는 공간이다. 그는 생전 아틀리에 직원과 모델, 예술가와 작가, 음악가와 정치인을 한 식탁으로 불러 직접 음식을 대접했다. 점심시간이면 스튜디오와 재봉 아틀리에의 작업이 멈췄고, 그는 모두에게 음식을 내어준 뒤 가장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다. 유명 인사와 재봉사가 나란히 앉았던 그 식탁에는 직업이나 명성에 따른 구분이 없었다.



현재 르 아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셰프 ‘이반 셰나티Ivan Schenatti’가 이탈리아 요리와 주간 마켓 메뉴를 선보인다. 전시를 둘러보고 책을 고른 뒤, 알라이아가 사람들을 맞이하던 중정에서 한 끼를 나누는 시간까지. 이곳은 한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사랑한 예술과 사람, 삶의 방식을 온전히 경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