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은 디렉터가 직접 선곡한 음악과 함께 에세이를 즐겨보세요.
겨울이 완전히 물러나기 전, 계절은 가장 먼저 식탁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공기는 차갑지만, 시장에는 루바브와 아스파라거스가 놓이고, 집 안에는 한층 가벼워진 음식들이 차려진다. 코펜하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푸드 디렉터 김성은은 이 미묘한 전환의 순간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포착해온 인물로, 이번 에세이는 그가 구성한 하나의 봄날—시장과 식탁, 그리고 루바브 타르트로 이어지는 장면을 따라, 계절이 스며드는 방식을 기록한다.
봄을 알리는 포스케 릴리

촉촉하게 젖은 땅 수선화들 위로 투명한 이슬이 맺힌다. 포스케 릴리Påske lilje라 불리는 덴마크의 수선화. 길게 뻗은 잎 사이로 봉오리를 꼭 오므린 채 팔리던 이 꽃은 물에 꽂아두면 며칠이 지나 여섯 장의 여린 꽃잎을 펼치며 피어난다.



겨울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생명력 강한 이 꽃이 길가 곳곳 노랗게 번지기 시작하면, 긴 겨울이 끝나고 새 계절이 왔음을 알린다. 짙은 회색빛 긴 겨울 틈으로 피어난 노란 얼굴은 땅에서 피어오르는 햇빛이 되어 따뜻함을 전한다.
종교적인 의미를 제쳐두고도 부활절은 여전히 덴마크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휴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일찍이 휴가를 떠난 이들로 도시는 고요해지고, 가게는 하나둘 문을 닫는다. 비워진 거리는 길게 내려앉은 햇빛으로 채워지고 옷깃을 싸매고 바삐 걷던 이들의 걸음이 느려진다.

집마다 커튼이 걷힌 아침, 창틀 위 화분의 꽃들이 가볍게 고개를 흔든다. 반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고양이가 코끝을 내밀고 바람 냄새를 맡는다. 아직 푸르름이 올라오지 않은 공원엔 두툼한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벤치와 잔디 위에 앉아 햇볕을 따라가며 얼굴을 돌리고, 이제 막 움이 트기 시작한 봉오리들이 낮게 고개를 내민다.


긴 호수를 가로질러 도착한 토브할레느네Torvehallerne 마켓. 시내 중심에 자리한 이 시장은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린다. 겨우내 덮어있던 장막이 걷히고 마켓엔 제철 과일과 채소들이 빛을 머금은 채 놓여있다. 그린 아스파라거스보다 조금 앞서 나오는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일렬로 진열되어 있고, 굵게 자란 대파와 윤기가 도는 토마토가 놓인 매대를 지나면 짙은 히아신스 향이 공기 사이로 번진다. 그 곁으로 작은 꽃이 촘촘히 달린 미모사와 색이 선명한 튤립들이 자리한다.


가져온 천 장바구니에 타르트를 만들 핑크빛 루바브 한 단을 집어 들고, 잎이 달린 큼지막한 레몬, 껍질에 흙이 그대로 묻어있는 감자들과 파슬리 한 단을 담는다. 바로 옆 실내 마켓에 들어서자, 푸른색 글씨로 이름이 적힌 유리 너머 싱싱한 생선들이 얼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생선튀김을 만들기 좋게 손질된 피스크 필레 사이에서 도톰한 대구 살 몇 점을 골라 부탁하자 아저씨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생선을 집어 올려 흰 종이 위에 겹겹이 싸서 건넨다. 두툼한 생선으로 한결 묵직해진 두 개의 장바구니를 어깨에 나눠 메고 집으로 돌아온다.

가까운 이들을 초대해 준비하는 부활절 점심. 가볍고 밝은 음식들로 채워진 테이블엔 삶은 달걀과 새우와 딜을 올린 에그 오 라이어Æg ogrejer, 식초에 절인 샬럿과 알 겨자로 버무린 청어, 겨자와 마요네즈에 버무린 청어와 덴마크의 통밀빵인 홀브롤 Rugbrød를 얇게 썰어 올려진다. 얇게 썬 덴마크식 통밀빵에 각자 좋아하는 것을 올려 스뫼어브로를 만들고 달콤한 몰트향이 가득한 호박색 부활절 맥주인 포스케브뤼Påskebryg를 나눈다. 잔을 부딪치고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스콜skål !
긴 겨울 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편안하고 느슨한 분위기 속 서로의 비워진 잔을 채워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접시가 한번 비워질 때쯤 버터와 파슬리로 버무린 감자요리와 바삭하게 튀겨낸 대구 필레가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덴마크에서 생선 요리와 자주 곁들여 먹는 레물라드Remoulade 소스를 접시에 나눠 담고 얇게 썬 레몬 한 조각을 곁들인다. 생선에 굵은소금 한두 꼬집을 올리고 비워진 잔에는 가벼운 오렌지빛 와인을 따른다.

흰 벽 위로 햇빛이 물결치듯 흔들리고 창으로 쏟아진 빛이 뺨 한쪽에 머문다. 두 발에 머리를 포개고 낮잠을 자던 고양이가 길게 몸을 늘려 기지개를 켜곤 발밑으로 다가온다. 주방 한편에서 고소한 커피 향이 나기 시작하고, 반쯤 녹아내린 양초가 켜진 테이블 위로 작은 디저트 포크가 놓인다. 가장자리가 노릇하게 익은 루바브 타르트가 테이블 중앙에 놓이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인다. 여러 번 밀어 만든 반죽에 아몬드 크림과 루바브로 채운 상큼한 타르트에 레몬 제스트가 눈처럼 흩어진다. 얇게 자른 타르트를 한 조각씩 접시에 나눠 담고 작은 달걀모양 초콜릿을 하나씩 돌려가며 집어 든다. 빛이 바랜 커피잔에 담긴 김이 가시지 않은 커피를 두 손에 쥔 채, 보랏빛으로 저물어가는 해를 보내며 긴 식사를 마무리한다.
Recipe of 루바브 타르트

겨울의 끝에서 봄을 맞이하는 식탁에는, 언제나 한 조각의 타르트가 놓여 있었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계절의 산뜻함을 그대로 머금은 디저트. 그 중심에는 늘 루바브가 있었다. 코펜하겐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푸드 디렉터 김성은에게 루바브는 단순한 제철 식재료가 아니다. 긴 겨울을 지나 막 피어나는 감각, 그리고 계절이 바뀌는 순간의 공기를 가장 정확하게 담아내는 재료에 가깝다. 그녀의 작업에는 늘 특정한 장면이 전제되는데, 그 장면 속에서 루바브는 종종 식사의 끝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지나온 시간을 부드럽게 마무리하고, 다음 계절로 건너가기 위한 작은 전환처럼.
버터 향이 겹겹이 쌓인 반죽 위에 아몬드 크림을 얹고, 신맛이 또렷한 루바브를 올려 구워낸 타르트. 여기에 가볍게 흩뿌린 레몬 제스트까지 더해지면, 이 디저트는 단순한 ‘달콤함’을 넘어 계절의 결을 입는다. 함께 모여 앉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한 조각, 그리고 길게 이어진 식사의 여운을 붙잡는 방식.
재료
파이지 반죽
밀가루 180 g 버터 95g 소금 0.8g 얼음물 40g 설탕 15g
아몬드 크림
버터 80 g 설탕 80g 달걀 80g 아몬드가루 80g 밀가루 7g 바닐라빈 1/3개
루바브 필링
루바브 200 g 설탕 15 g 레몬즙 5g


요리 과정
1. 보울에 밀가루, 설탕 소금을 넣고 섞는다.
2. 차가운 버터를 넣고 손이나 스크래퍼로 보슬보슬하게 잘게 부숴준다.
3. 얼음물을 더해 한 덩어리로 뭉친 뒤 납작하게 눌러 랩으로 싸서 냉장에 한 시간 이상 휴지시킨다.
4. 부드러운 실온의 버터에 설탕, 바닐라빈을 넣고 섞는다.
5. 달걀을 조금씩 나눠 넣으며 섞어주고, 아몬드 가루와 밀가루를 넣어 마무리한다.
6. 루바브는 3cm 정도의 사선으로 썰어준다.
7. 썰어둔 루바브에 설탕과 레몬즙을 넣고 가볍게 섞어준 뒤 10분 정도 두었다가 수분을 가볍게 제거한다.
8. 차갑게 휴지시킨 파이지를 꺼내 2.5mm 정도로 밀어준 뒤 포크로 구멍을 낸다.
9. 틀에 맞춰 깐 뒤 아몬드 크림을 올리고 썰어둔 루바브를 올린다.
10. 170°C로 예열한 오븐에서 45~50분 정도 가장자리 색이 노릇해질 때까지 굽는다.
11. 구워낸 뒤 기호에 따라 시럽을 발라주거나 한 김 식힌 뒤 레몬 제스트를 흩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