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비단 배우만이 아니다. 조명, 의상, 음악, 세트, 소품 등 한 장면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전한다. 특히 영화 속 시각적 요소들은 감독의 비전을 명확히 반영하도록 세심히 설계되어 영화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표현한다. 작품 전체의 시각적 콘셉트와 무드를 창조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이 중요한 이유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오디세이The Odyssey〉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신비한 이야기를 인간의 사실적인 고뇌로 재해석하며,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작품 세계를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
〈오디세이〉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루스 드 용

〈오디세이〉는 3,000여 년 동안 상상 속에 머물렀던 이야기를 나무와 돌, 모래와 바다로 이루어진 세계에 내려놓는다. 그 중심에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루스 드 용Ruth De Jong이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2007),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2011), 〈맨체스터 바이 더 시Manchester by the Sea〉(2016) 등 주로 사실적인 작가 영화 위주로 작업해 온 루스 드 용은 〈오펜하이머Oppenheimer〉(2023)를 계기로 크리스토퍼 놀란과 처음 협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만큼, 철저한 자료 조사에 기반해 미국 뉴멕시코주의 황무지에 1940년대 로스 앨러모스Los Alamos를 정교하게 재현해 화제를 모았다. 관객의 몰입을 돕는 사실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영화 시상식의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에서 여러 차례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며 그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다.

80여 년 전의 미국을 되살렸던 루스 드 용은 이번에는 3,000년 가까이 전해져 온 신화의 세계를 시각화해야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함께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여러 번역·해석본을 깊이 연구했지만, 텍스트 자체에 얽매이는 것은 지양했다. 기존에 영상화된 사례들을 참고하는 대신 감독의 비전과 디자이너의 독창성을 중심으로 〈오디세이〉만의 세계를 그려나갔다. 루스 드 용은 자신의 목표를 “신화와 현실을 결합하면서도 방금 발굴된 것처럼 생생한 세계를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Object Design | 트로이의 목마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 〈트로이Troy〉(2004)의 각색에 일부 참여했던 크리스토퍼 놀란. 그는 어릴 적부터 즐겨 읽은 신화를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목마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20여 년 만에 마침내 현실이 된 목마의 디자인은 그동안 여러 차례 영상화된 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높이 10.7m, 무게 3.6t에 달하는 거대한 모형으로, 배우들과 제작진, IMAX 카메라까지 내부에 진입할 수 있게 설계됐다. 루스 드 용과 크리스토퍼 놀란은 목마가 웅장하고 불길한 존재감을 지니길 원했고, 그에 따라 두 발을 치켜든 야생마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정적인 운송 수단보다는 금방이라도 몸부림치거나 덮칠 듯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250여 명의 배우와 스턴트맨이 직접 밧줄로 끌어당겨야 했다 ©Universal Pictures
기존의 목마들이 성 안으로 진입하기 쉽게 바퀴를 장착한 데 비해, 이번에는 바퀴 없이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디자인했다. 목마의 머리와 다리는 목재를 직접 손으로 조각해 제작했으며, 몸통은 강철 구조물과 목재, 유리섬유 소재 등을 결합해 제작했다. 한편, 실내 공간은 촬영을 위한 실질적인 세트인 동시에, 의도적으로 비좁게 구성해 목마 안의 그리스 병사들이 느낄 불안감과 긴장감, 공포를 시각화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이처럼 외부에서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괴물, 내부는 폐쇄적인 관이나 감옥처럼 기능하는 목마는 트로이의 멸망을 불러오는 존재로서 영화 내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Location·Set Design | 트로이

목마 진입 후 빠르게 멸망으로 치닫는 트로이는 모로코 남부 우아르자자트Ouarzazate 지역의 유서 깊은 도시인 ‘아이트 벤 하도우Aït Ben Haddou’에서 촬영했다. 독특한 양식의 진흙 벽돌 건축물들 덕분에 사막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필요한 할리우드 영화들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트로이 유적은 현재 튀르키예 북서부에 남아 있지만, 제작진은 수백 년간 침식된 흙벽의 질감, 현대 건축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 주변 풍경, 좁고 복잡한 골목, 대규모 촬영을 지원하는 인프라 등을 이유로 이곳을 촬영지로 선정했다. 기존 마을 외에도 약 10,000㎡ 규모의 신규 세트를 인근에 조성해, 실제보다 훨씬 넓고 복잡한 도시처럼 보이게 했다.

루스 드 용은 매끈하고 이상적인 고대 도시보다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거주한 흔적이 느껴지는 공간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흙과 목재, 석재, 석고 등 거친 질감의 소재들을 주로 활용하고, 표면 곳곳에 시간과 생활의 흔적을 더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붕괴시켜야 하거나 불에 타야 하는 건물들은 직접 제작해 세트 내에서 촬영했다. 거대한 규모를 보여주는 장면은 세트에서 진행하되, 인물들이 뒤엉켜 골목을 오가는 장면들은 대개 마을의 좁은 길들을 활용했다. 그 결과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왕국인 동시에, 그리스 군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지는 트로이의 모습을 실감 나게 표현하며 도시가 순식간에 몰락하는 과정을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설득할 수 있었다.
Object Design | 오디세우스의 함대

〈오디세이〉 촬영 중에는 관객들의 몰입을 해치지 않기 위해 일시적으로 교체되었다 ©Draken Harald Hårfagre
국내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된 오디세우스Odysseus의 함대는 실제로 항해가 가능한 배를 바다에 띄워 촬영한 결과물이다. 현대에 제작된 목조 바이킹 선박들을 대여해 활용했는데, 멀리서 배의 실루엣을 담을 때는 노를 젓는 전문 인력이 참여했으며, 가까이서 촬영을 진행할 때는 배우들이 직접 배를 움직였다. 오디세우스가 탑승한 배는 노르웨이에서 건조된 ‘드라켄 하랄 하르파그레Draken Harald Hårfagre’로, 고고학 자료와 바이킹 전통 조선술을 토대로 2012년 제작한 실험용 선박이다. 대서양을 횡단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어, 그린스크린보다 실물에 기반한 현장 촬영을 고수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스타일에 적합했다.

루스 드 용과 제작진은 바이킹 선박에 고대 그리스식 돛과 노, 청동 장식을 더해 개조했다. 설정상 10년 간의 전쟁을 마치고 복귀하는 배인 만큼, 지나치게 새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선박 곳곳에 마모되고 훼손된 흔적들을 추가해 현실감을 부여했다. 한편, 루스 드 용은 선박의 장식으로 인물의 성격을 은연중에 드러내고자 했다. 극 중 그리스 연합군의 최고 지도자인 아가멤논Agamemnon 장군의 선박은 밝고 화려한 청동 장식을 사용했지만, 오디세우스의 함대에는 검게 그을린 듯한 어두운 청동을 적용해 절제되고 실용적인 인상을 표현했다.
Location·Creature Design | 폴리페모스와 동굴


고대 그리스 연구에서 중요한 장소로 평가받는 네스토르의 동굴 ©Tripadvisor
(오) 촬영 현장에서 사용한 폴리페모스 인형 ©Universal Pictures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Museo Nacional del Prado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Polyphemus’의 동굴은 오디세우스 일행을 처음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중요한 공간이다. 제작진은 그리스 보이도킬리아Voidokoilia 해변 위 절벽에 자리한 ‘네스토르의 동굴Nestor's Cave’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입구는 바다를 향해 크게 열려있지만, 내부로 들어갈수록 자연광이 빠르게 사라지는 구조는 동굴에 갇히는 주인공 일행의 위태로운 상황을 담아내기 적격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동굴에 대한 설화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전승됐다는 것. 신화 속 영웅 네스토르, 혹은 그의 아버지인 넬레우스Neleus가 소들을 키우던 동굴로 알려졌으며, 도둑의 신 헤르메스Hermes가 어린 시절 신들로부터 훔친 소들을 숨긴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화적 기억이 축적된 장소가 또 다른 신화 속 무대로 활용된 셈이다.


약 18m 길이의 실물 인형으로 구현한 폴리페모스의 디자인은 스페인의 회화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rn Devouring His Son〉가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마르고 기형적인 존재가 어둠 속에서 인간을 뜯어먹는 섬뜩한 묘사는 거인의 형태와 장면의 톤 앤 매너를 구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폴리페모스가 등장하는 장면은 기계 장치와 와이어를 탑재한 인형과 특수 분장을 한 배우가 연기한 것을 편집으로 결합해 완성했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 속 로봇 ‘타스TARS’의 조종과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배우 빌 어윈Bill Irwin이 합류해, 이번에도 인간이 아닌 존재에 움직임과 감정을 부여했다. 촬영 현장에 실물로 존재한 폴리페모스 덕분에, 제작진은 CG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그림자와 빛의 굴곡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배경 위에 더해진 이미지가 아닌, 오디세우스의 생명을 위협하는 생생한 생명체로서 관객들의 몰입을 유도했다.
Location | 저승

현재는 내륙에 고립된 산처럼 변한 효를레이프스회프디 ©Visit South Iceland
극 중 예언자 테이레시아스Tiresias로부터 중요한 신탁을 받기 위해 방문하는 저승은 오디세우스의 여정에서 가장 먼 장소인 동시에 살아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곳이다. 그동안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저승을 화려한 지하 궁전이나 어두운 판타지 세계로 그려온 것과 달리, 〈오디세이〉는 아이슬란드의 척박한 자연 지형을 활용해 독창적인 재해석을 보여줬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아이슬란드 남부의 바위산 ‘효를레이프스회프디Hjörleifshöfði’ 인근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오디세우스의 고향인 이타카와 기후도 빛도 지면의 색도 확연히 다른 낯선 장소로, 건축물을 비롯한 인간의 흔적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시야를 가로막는 키 큰 나무나 울창한 숲도 없어 검은 모래 평원과 바위, 산 등 지극히 단순한 형태의 험난한 자연만 존재하는 지역이다. 이에 별도의 시각적 요소를 더하는 대신, 자연 그 자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 집중하며 〈오디세이〉만의 저승을 완성했다.

루스 드 용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제작 초기 단계부터 아이슬란드에서 저승을 촬영하고 싶어 했다며, 두 사람이 추구한 방향성을 “미니멀리즘적이면서도 브루탈리즘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촬영은 해가 지지 않는 백야 기간에 진행됐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세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짙은 어둠이나 안개 대신, 완전한 자연광이 공간을 채웠다.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지만, 시간과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공간은 저승을 오히려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Location·Set Design | 이타카

오디세우스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최종 목적지인 고향 ‘이타카Ithaca 왕국’. 실제 이타카섬은 그리스 이오니아해에 있지만, 제작진은 시칠리아 서부의 파비냐나Favignana 섬을 무대로 선택했다. 설정 상 섬 전체를 둘러싼 지중해가 한눈에 보이면서도 배가 상륙 가능한 해안이 있어야 하며, 현대 도시의 흔적이 최대한 적고 산 정상에 성채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섬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자리한 산타 카테리나 성Castello di Santa Caterina을 왕궁으로 삼았다. 이곳은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에게는 귀향을 확인하는 표식이지만, 아내 페넬로페Penelope와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us에게는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공간이 된다. 왕궁 외관과 외부 진입로, 성벽 인근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은 섬에서 직접 촬영하고, 왕궁 내부는 LA의 세트장에 건설해 촬영했다.


왕궁의 중심에 자리한 연회장은 20년 동안 자리를 비운 오디세우스를 대신해,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100여 명의 구혼자들이 연회를 벌이며 이타카의 재산을 탕진하는 공간이다. 수많은 배우와 제작진들을 모두 수용해야 하고, 결말부의 중요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무대이기에 3층 높이의 무대에 미식축구장 두 개 규모의 크기로 지어졌다. 인테리어 디자인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낮은 천장’으로, 왕의 위엄보다는 가정적이고 편안한 공간으로 느껴지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한편, 실내 공간 구성이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치이기도 하다는 점이 이곳의 흥미로운 부분이다. 구혼자들이 점령한 연회장에서 계단을 몇 개 오르면 문으로 구분된 페넬로페의 사적 공간이 나타나는데, 이는 왕궁에서 외부의 적들을 내려다보며 감시하는 구조가 실내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구혼자들로부터 이타카를 지키고 있지만, 그 한계가 얼마 남지 않은 위태로운 상황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Editor’s Comment
〈오디세이〉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화려하게 재현하는데 머물지 않았다. 상상 속 존재에 육중한 물성을 부여하며 과거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사실적인 현대 영화로 재해석했다. 또한 주요 캐릭터들의 특성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번역해 관객들로부터 공감을 자아냈다. 결국 루스 드 용이 디자인한 것은 오디세우스가 직접 걷고 항해하고 싸우며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세계에 가깝다. 그렇게 〈오디세이〉는 3,000년 넘게 전해진 신화를 무게와 온도, 상처를 지닌 한 인간의 험난한 여정으로 새롭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