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북쪽,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에 자리한 코모Como. 알프스 산자락에 둘러싸인 코모 호수를 따라 유서 깊은 빌라와 정원, 작은 마을이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휴양지다. 이 도시의 매력은 빼어난 풍경에만 있지 않다. 오랫동안 실크 산업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주세페 테라니Giuseppe Terragni를 비롯한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의 흔적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자연과 산업, 건축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코모는 디자인을 이야기하기에도 더없이 흥미로운 도시다.

ⒸLake Como Design Festival
레이크 코모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만난 하이라이트 6
2018년 시작된 레이크 코모 디자인 페스티벌Lake Como Design Festival은 이러한 도시의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매년 하나의 주제 아래 전시와 설치, 토크를 선보이며, 오래된 빌라와 궁전, 교회 같은 건축물을 전시장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올해는 처음으로 코모를 넘어 호수 동쪽의 레코Lecco까지 무대를 넓혔다. 여덟 번째 에디션으로 돌아온 레이크 코모 디자인 페스티벌의 주제는 ‘경계Border’. 재료와 기능, 예술과 디자인, 과거와 현재처럼 서로 다른 영역이 맞닿는 지점을 탐구한다. 9월 12일부터 20일까지 9일간 코모와 레코 곳곳에서 전시와 설치, 토크가 이어졌고, 참여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계를 해석했다. 그중 눈여겨볼 여섯 장면을 소개한다.

동시대 디자인이 경계를 다루는 법, ‘컨템퍼러리 디자인 셀렉션’


ⒸStudio Yellowdot
올해의 주제를 가장 직관적으로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컨템퍼러리 디자인 셀렉션Contemporary Design Selection’이다. 벨기에 브뤼셀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조반나 마소니Giovanna Massoni가 4년 연속 큐레이팅을 맡아 약 30여 개국에서 온 50여 팀의 가구와 조명, 오브제, 텍스타일을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장도 독특하다. 올해 처음 공개된 빌라 사포리티Villa Saporiti는 18세기 후반에 지은 신고전주의 건축으로, 타원형 살롱과 코모 호수를 향해 열린 파사드가 눈길을 끈다.


나무 가루를 섞은 바이오플라스틱을 로봇 3D 프린팅해 완성했다. ⒸStudio Yellowdot
참여작들은 재료와 기술, 기능의 경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핀다. 홍콩과 이스탄불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튜디오 옐로우닷Studio Yellowdot의 데이베드 〈타틸레Tattile〉는 파스타에서 형태를 가져왔다. 포크에 감기는 면의 유려한 곡선과 속이 빈 파스타의 단면을 크게 확장해 가구로 치환했다. 나무 가루를 섞은 바이오플라스틱을 로봇으로 3D 프린팅해 이음새 없이 완성한 제작 방식도 흥미롭다. 음식의 형태와 디지털 제작 기술, 가구의 기능이 한 몸처럼 얽힌 작업이다.


밀라노 출신의 아트 디자인 스튜디오 마시모 리갈리아Massimo Rigaglia의 〈라이츠 인 텐션Lights in Tension〉은 대나무의 잘 휘는 성질을 고스란히 살린 조명이다. 가늘게 쪼갠 대나무를 활처럼 휘고, 양 끝을 가죽 끈으로 당겨 긴장감 있는 곡선을 잡아냈다. 대나무가 지닌 탄성과 장력을 별도의 복잡한 구조 없이 그대로 활용한 점이 핵심이다. 첨단 3D 프린팅부터 자연 재료의 물성까지, 서로 다른 접근이 한 전시 안에서 만나며 올해의 화두인 ‘경계’를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줬다.
아카이브는 어떻게 미래가 되는가, ‘퓨처 인 더 패스트’


벽면에는 목재와 마감 샘플, 장인 기술을 보여주는 영상과 조명 요소를 숨겨두어 문을 열고 하나씩 발견하도록 구성했다.
ⒸNathalie Krag
코모호를 마주한 저택, 빌라 델 그루멜로Villa del Grumello에서 열린 전시 《퓨처 인 더 패스트Future in the Past》는 아카이브를 과거의 기록이 아닌 새로운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바라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니콜로 스피넬리Nicolò Spinelli와 목공 아틀리에 시모네토Simonetto가 만든 〈솔리에Soglie〉가 먼저 시선을 끈다. 엘리사 오시노Elisa Ossino가 연출한 유칼립투스 패널이 방의 벽을 따라 이어지고, 그 사이 12개의 벽면에는 영상과 오브제를 넣었다. ‘문턱’을 뜻하는 제목처럼 오래된 빌라와 새로 만든 구조가 맞닿으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빌라 델 그루멜로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그의 브라질 시기에 고안된 접이식 목재 의자 등을 만날 수 있다.
ⒸInstituto Bardi, ETE
이 전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리나 보 바르디Lina Bo Bardi’. 브라질 디자인 가구 브랜드 에텔ETEL과 리나 보 바르디의 유산을 연구하는 인스티투토 바르디Instituto Bardi는 1951년 완성한 자택 카사 지 비드루Casa de Vidro와, 옛 공장을 문화 시설로 바꾼 세스크 폼페이아SESC Pompéia를 사진과 가구, 아카이브로 함께 보여준다. 사적인 집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공 공간까지, 두 건축 사이에는 리나가 브라질에서 디자인한 가구들이 놓였다. 그의 작업이 ‘집을 위한 디자인’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간을 위한 디자인’으로 넓어지는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완성작 너머의 디자인을 살피다, ‘스튜디오 비지트’


레진과 빛, 색을 실험해온 〈트랜스패런시 매터스〉 컬렉션의 가구와 조명을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
ⒸDraga & Aurel
레이크 코모 디자인 페스티벌의 백미는 단연 스튜디오 비지트Studio Visit. 평소 쉽게 들어가 보기 어려운 디자이너의 작업실과 아틀리에, 갤러리, 아카이브를 축제 기간 동안 공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완성된 결과물의 이면에 놓인 재료와 도구부터 제작 과정까지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다.


비대칭 구조의 커피 테이블까지 스튜디오의 대표작이 곳곳에 놓였다.
ⒸDraga & Aurel
이번에 찾아간 곳은 코모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드라가 & 아우렐Draga & Aurel의 아틀리에다. 드라가 오브라도비치Draga Obradovic와 아우렐 K. 바세도우Aurel K. Basedow가 2007년 설립한 스튜디오로, 예술과 컬렉터블 디자인 사이를 오가며 재료 실험을 이어왔다. 레진과 유리, 아크릴, 금속, 콘크리트 등을 겹치고 가공해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과 투명도, 깊이를 탐구한다. 2019년 시작한 대표 컬렉션 〈트랜스패런시 매터스Transparency Matters〉도 이러한 실험에서 출발했다. 작품 대부분을 코모 아틀리에에서 직접 제작하는 만큼, 완성된 가구와 오브제뿐 아니라 재료를 다루는 방식과 제작 과정까지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오래된 교회에 만든 공동의 거실, ‘피네 코무네’


ⒸSilvia Rivoltella
거친 벽돌과 오래된 프레스코 벽화가 남은 산타 카테리나 교회Santa Caterina. 그 안에 대형 소파와 러그, 조각적인 오브제가 들어서자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17세기 교회는 작품을 바라보는 곳을 넘어, 사람들이 앉아 쉬고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됐다. ‘경계’를 만남의 지점으로 풀어낸 《피네 코무네Fine Comune》 전시다.


거칠게 남은 교회 벽과 광택을 입힌 붉은 오브제가 강렬한 시각적 대비를 선사한다.
(오) 조각적인 실루엣과 넉넉한 볼륨이 특징인 크리스 샤오의 〈Good for Business Armchair〉.
ⒸSilvia Rivoltella
전시장 중앙을 채운 것은 아체르비스Acerbis의 모듈 소파 〈프리 시스템Free System〉과 씨씨타피스cc-tapis의 러그. 작품을 둘러보다 잠시 앉아 쉬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까지 전시 경험의 일부가 됐다. 여기에 밀라노 기반의 모비멘토 갤러리Movimento Gallery가 세계 각지 디자이너의 컬렉터블 디자인을 더했다. 과거와 현재, 예술과 디자인, 감상과 휴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성은 올해 페스티벌 주제인 ‘경계’를 실제 경험으로 옮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눈이 아닌 손으로 디자인을 읽는 법, ‘비욘드 시잉’


내부 셰이드를 회전시켜 광원을 가리거나 드러내며, 빛의 세기를 조절한다.
올해 《비욘드 시잉》에서는 이 구조를 촉각과 소리로 탐색할 수 있는 감각형 버전으로 선보여,
시각장애인도 디자인의 원리를 경험하도록 했다. ⒸLake Como Design Festival
올해 처음 페스티벌의 무대가 된 레코Lecco에서 눈여겨본 전시는 《비욘드 시잉Beyond Seeing》이었다. 밀라노 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위해 쿨투라 메카니카Cultura Meccanica가 기획하고 이탈리아 시각장애인협회가 협업한 프로젝트로, 시각장애인과 저시력자도 예술과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도록 촉각과 소리를 활용했다. 전시장에서는 비코 마지스트레티Vico Magistretti의 에클리쎄Eclisse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한 장치를 공개했다. 손으로 둥근 몸체와 각 부품의 관계를 더듬고, 소리를 따라 작동 원리를 이해하면서 눈으로 보던 조명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게 했다.


에클리쎄는 마지스트레티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암등dark lantern’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설계한 조명이다. 고정된 외피 안에서 반구형 셰이드가 회전하며 전구를 가리고 드러내고, 그 움직임에 따라 직접광과 확산광이 달라진다. 이번 전시는 그 핵심인 ‘회전하고, 가리고, 빛을 조절하는’ 과정을 촉각과 청각의 언어로 옮겼다. 디자인 아이콘을 다시 만드는 대신, 우리가 물건을 이해하는 감각의 범위를 넓혔다는 점에서 오래 시선을 붙들었다.
코모의 건축을 따라 걷다, ‘라치오날리스트 코모’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Lake Como Design Festival
코모를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건축을 따라 걷는 것이다. 〈라치오날리스트 코모Rationalist Como〉는 도시 곳곳에 산재한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을 살펴보는 프로그램이다. 지역의 건축가와 미술사학자가 동행해 입면의 구성과 공간 조직, 재료와 구조를 짚고, 1920~30년대 코모에서 전개된 합리주의 건축의 흐름을 설명한다.



ⒸLake Como Design Festival
대표적인 건축으로 주세페 테라니Giuseppe Terragni의 카사 델 파쇼Casa del Fascio를 빼놓을 수 없다. 멀리서 보면 반듯한 흰색 상자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네 면의 구성이 모두 다르다. 기둥과 벽, 창과 빈 공간의 비율을 달리해 단순한 형태 안에 치밀한 리듬을 만든 것. 중앙의 아트리움과 넓은 유리 면은 안과 밖의 시선을 연결한다.
Editor’s Comment
코모를 처음 방문한다면, 호숫가 산책에 이 투어를 한 번쯤 더해보길 권한다. 건축 지식이 많지 않아도 괜찮다.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 창의 비례와 벽의 두께, 재료와 구조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합리주의 건축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투어를 따라 걷다 보면, 개별 건물만 보이던 시선도 조금씩 도시 전체로 넓어지기 시작한다. 광장과 도로, 호숫가를 사이에 두고 건축물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도 훨씬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