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는 이제 음식만큼이나 어떤 그릇과 잔을 올려둘지에 대한 취향이 함께 놓인다. 테이블웨어는 단순히 음식을 담는 사물을 넘어, 하루의 온기와 대화의 분위기, 머무는 시간을 담아내는 오브제로 확장됐다. 과거의 사교 문화와 생활 방식에서 비롯된 디자인은 용도와 소재를 넘어 하나의 장면처럼 기억되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의 식탁 위에 조용히 머문다.

사물과 사용자의 관계를 탐구하는 디자이너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프랑스계 미국인 디자이너, 소피 루 야콥센Sophie Lou Jacobsen. 2019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스튜디오를 설립한 이후, 유리를 소재로 한 홈웨어 및 컬렉터블 컬렉션을 선보여 왔다. 특히 컵, 화병, 캔들 홀더, 테이블 램프처럼 일상의 오브제를 조형적인 실루엣과 유희적인 디테일로 재해석하며, 실용성과 조각적 아름다움 사이의 균형을 보여준다.
시적인 순간을 완성하는 일상의 사물



사물이 기능을 넘어 사용자의 감정을 환기한다고 믿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유년 시절 경험에서 비롯됐다. 시애틀의 프랑스 가정에서 자란 야콥센에게 하루 세 끼를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는 일상의 중요한 의식이었다. 자연스레 테이블 위 물건들과 오래 머무는 법을 배웠다. 천천히 대화를 나누고, 손끝으로 오브제를 만지며 사물에 대한 감각을 길러온 것.



ⒸSophie Lou Jacobsen
프랑스적 감수성과 뉴욕의 모던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유럽 장식예술의 미학이 공존한다는 점 역시 소피 루 야콥센 작업의 중요한 특징이다. 최근에는 영국 럭셔리 벽지 브랜드 ‘드 고네de Gournay‘와 협업한 ‘튤리파Tulipa’ 조명 시리즈를 비롯해, 꽃의 유기적인 형태를 담아낸 글라스웨어 컬렉션 ‘르 베흐 봉봉Le Verre Bonbon’ 에서도 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기능적 오브제와 예술적 표현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그의 작업은 컨템포러리 테이블웨어 디자인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한층 대담하고 유쾌한 ‘밤’의 오브제



지금껏 소피 루 야콥센의 컬렉션이 아르데코 특유의 우아함과 장식적인 리듬, 테이블 위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집중해 왔다면, 최근 선보인 ‘디스코 아페리티보Disco Aperitivo’는 한층 대담하고 관능적인 무드를 발산한다. 이번 컬렉션에서는 야콥센 특유의 맑고 정제된 디자인 언어를 유지하면서도, 과감한 컬러와 반짝이는 소재가 자아내는 화려한 에너지가 두드러진다. 마치 단정한 티타임의 세계에서 1970~80년대 이탈리아 ‘디스코 라운지 바’로 무대를 옮겨온 듯하다.

‘디스코 아페리티보’는 야콥센이 밀라노에서 경험한 이탈리아의 ‘아페리티보Aperitivo 문화’에서 출발했다. 저녁 식사 전, 친구들과 가볍게 술과 스낵을 나누는 이 시간은 그녀에게 하루의 리듬을 천천히 전환하는 하나의 리추얼처럼 다가왔다. 여기에 1970~80년대 이탈리아 디스코 신의 화려한 에너지와 당시 인테리어의 장식적 미감을 더해, 시대 특유의 글래머와 사교 문화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냈다. 특히 오래된 밀라노 바와 디스코 클럽에 남아 있는 과장된 광택, 스모키한 공기, 밤늦도록 이어지던 사교 문화의 분위기가 짙게 스며 있다.

당시 디스코 문화와 디자인을 연구하며 제가 열고 싶은 디스코 파티를 상상하곤 했어요.
‘아레아AREA’나 ‘바이라 델리 안젤리Baia degli Angeli’ 같은
클럽의 황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파티 말이죠.
그러다 밀라노에서 아페리티보를 즐기던 어느 저녁, ‘디스코 아페리티보’라는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고 곧바로 이 컬렉션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 소피 루 야콥센



(오) 샴페인을 즐기기 좋은 클래식 글라스, ‘로마 쿠페(Roma Coupe)’
ⒸSophie Lou Jacobsen

이번 컬렉션은 칵테일 잔과 패턴 플레이트를 비롯해 에나멜 코퍼 트레이 ‘카프리 트레이Capri Tray’, 애시 트레이 ‘폴리Follie’, 담배 보관통 형태의 시가렛 박스 ‘라 도나La Donna’ 등 총 14개의 피스로 구성했다. 각각의 오브제는 1980년대 이탈리아 바 인테리어를 떠올리게 하는 대담한 실루엣과 반짝이는 표면, 깊이감 있는 컬러를 통해 디스코 문화 특유의 퇴폐적 글래머를 보여준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장식한 애시 트레이와 글라스는 디스코볼처럼 화려한 빛을 부드럽게 흩뿌리고, 길게 뻗은 시가렛 홀더와 짙은 톤의 짧은 줄기,둥근 보울의 ‘쿠페 글라스Coupe Glass’는 마치 1980년대 이탈리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무드를 자아낸다.



소재에 대한 접근도 인상적이다. 야콥센은 이번 작업을 위해 베네치아 공방과 협업해, 1960~70년대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즐겨 사용하던, 구리 바탕 위에 유리질 유약을 여러 겹 입혀 고온의 가마에서 구워내는 전통 공예인 ‘코퍼 에나멜링Copper Enamelling’ 기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렸다. 여기에 유리와 크리스털, 패턴 글라스를 조합해 한층 강렬하고 관능적인 질감을 완성했다. 영국 패션 디자이너 ‘자인 알리Zain Ali’와 협업한 실크 러플 매트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파키스탄에서 직조와 봉제를 거쳐 완성된 이 텍스타일 피스는 관능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더하며, 컬렉션 전반에 자유롭고 연극적인 감각을 불어넣는다.



‘디스코 아페리티보’는 2026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 동안 로레토 지역의 주거 공간 ‘아파르타멘토 38 Appartamento 38’에서 공개됐다. 야콥센은 이곳을 1980년대 디스코 라운지처럼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연출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짙어지는 공기와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느슨한 분위기, 사교의 순간들까지. 디스코 아페리티보 컬렉션은 야콥센의 작업 세계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실험적인 챕터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