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ial

선택할 일이 줄어드는 집, AI 가전의 다음 역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그릇은 어떤 코스로 씻을지, 오븐 온도는 몇 도로 맞출지. 집안일에는 손을 움직이는 만큼 판단이 필요하다. 냉장고 속 재료로 메뉴를 제안하고, 식기의 상태에 따라 세척 방식을 정하는 AI 가전은 그 판단의 일부를 나눠 맡는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밀레와 지멘스의 가전을 통해 우리가 집을 돌보는 방식의 변화를 살펴본다.

Editorial

선택할 일이 줄어드는 집, AI 가전의 다음 역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그릇은 어떤 코스로 씻을지, 오븐 온도는 몇 도로 맞출지. 집안일에는 손을 움직이는 만큼 판단이 필요하다. 냉장고 속 재료로 메뉴를 제안하고, 식기의 상태에 따라 세척 방식을 정하는 AI 가전은 그 판단의 일부를 나눠 맡는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밀레와 지멘스의 가전을 통해 우리가 집을 돌보는 방식의 변화를 살펴본다.

Editorial

선택할 일이 줄어드는 집, AI 가전의 다음 역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그릇은 어떤 코스로 씻을지, 오븐 온도는 몇 도로 맞출지. 집안일에는 손을 움직이는 만큼 판단이 필요하다. 냉장고 속 재료로 메뉴를 제안하고, 식기의 상태에 따라 세척 방식을 정하는 AI 가전은 그 판단의 일부를 나눠 맡는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밀레와 지멘스의 가전을 통해 우리가 집을 돌보는 방식의 변화를 살펴본다.

가전은 오랫동안 집안일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세탁기가 빨래를 하고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를 대신하면서 직접 손을 움직여야 하는 시간은 크게 줄었다. 그런데 집안일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냉장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오늘 먹을 것을 정한다. 식기의 상태를 보고 세척 코스를 고르고 오븐에 음식을 넣기 전에는 적당한 온도와 시간을 찾는다. 손이 덜 가게 된 뒤에도 이런 크고 작은 판단은 사람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최근 AI 가전은 바로 이 지점으로 들어오고 있다. 카메라와 센서가 식재료와 식기, 음식의 상태를 먼저 살피고 그에 맞는 기능을 제안한다. 사람이 상황을 확인하고 기능을 찾아 설정하는 순서 사이에 AI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FA 2026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당신의 AI 일상 동반자Your Companion to AI Living’를 내세웠고, LG전자는 여러 가전과 서비스를 연결한 AI홈을 선보였다. 밀레는 한발 더 나아가 ‘집안일의 종말이 보인다The End of Housework Is in Sight’고 선언했다. 표현은 제각각이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닮아 있다. 집안일을 대신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집안일을 위해 사람이 신경 써야 하는 순간까지 줄이는 것이다. ‘집안일의 종말’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 시작은 이미 꽤 구체적이다. 냉장고가 저녁 메뉴를 함께 고민하고 식기세척기가 알아서 세척 방식을 고른다. 오븐은 음식에 맞는 온도와 시간을 먼저 제안한다. 버튼을 누르는 수고보다 버튼을 누르기 전에 했던 생각을 덜어주는 것. 최근 AI 가전에서 눈여겨볼 변화는 여기에 있다.

제미나이를 탑재한 삼성전자 ‘ 2026년형 비스포크 AI 패밀리허브 냉장고’. Ⓒ삼성전자

냉장고가 저녁 메뉴를 먼저 살핀다

삼성전자는 IFA 2026에서 ‘당신의 AI 일상 동반자’를 주제로 가전과 스마트 기기가 연결돼
사용자의 생활 방식과 필요에 맞춰 작동하는 AI 리빙을 선보였다. Ⓒ삼성전자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달걀과 채소 몇 가지가 남아 있다. 무엇을 해 먹을 수 있을지 떠올리다 결국 휴대폰으로 레시피를 검색한다. 흔한 저녁 풍경이다. 식재료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냉장고가 맡아왔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고 무엇을 만들어 먹을지는 사람이 직접 살펴야 했다. 삼성전자의 ‘비스포크 AI 패밀리허브’ 냉장고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내부 카메라와 ‘AI 비전’ 기술로 식재료를 인식하고 보유한 재료에 맞춰 레시피를 제안한다. 대형 터치스크린에서는 연결된 가전의 전력 사용량도 확인하고 제어할 수 있다. 식기세척기의 ‘AI 맞춤 세척’은 식기의 오염도를 감지해 물과 에너지 사용량을 조절한다. 냉장고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릇이 얼마나 더러운지 살피는 일부터 가전이 가져가기 시작한 셈이다.

IFA2026 혁신상을 받은 삼성전자 비스포크 AI 패밀리허브 Ⓒ삼성전자

삼성전자가 그리는 그림은 주방을 넘어선다. IFA 2026에서는 AI 리빙을 ‘엔터테인먼트 컴패니언’, ‘홈 컴패니언’, ‘셀프케어 컴패니언’으로 나눠 TV를 보는 시간부터 집안일과 건강관리까지 AI가 일상 곳곳에 관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에서 공개한 ‘홈 컴패니언’도 같은 방향을 향한다. 비스포크 AI 냉장고는 목소리를 인식해 개인 일정과 활동 정보를 보여주고 음성 명령으로 문을 여닫는다. 로봇청소기는 카메라로 주변을 살피며 움직이고 인공지능 가상 비서 플랫폼 ‘빅스비Bixby’가 탑재된 가전에는 기능이나 사용법을 직접 물어볼 수 있다. 삼성전자가 이를 ‘보고, 듣고, 말하는 가전’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과거의 스마트 가전이 사람의 명령을 더 편하게 수행했다면 이제는 명령을 내리기 전의 상황까지 읽으려 한다. 사람이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기능을 골라 알려주는 대신 가전이 먼저 살핀 뒤 선택지를 건네는 쪽으로 순서가 달라지고 있다.

따로 움직이던 가전이 한 팀이 되면

하루 동안 집에서 사용하는 가전은 하나가 아니다. 아침에는 냉장고를 열고 외출 전에는 에어컨과 조명을 확인한다. 저녁에는 오븐으로 요리하고 식사를 마치면 식기세척기를 돌린다. 각각의 가전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따로 움직인다면 그 사이를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하고 기기마다 상태를 확인해 하나씩 작동시켜야 한다. 가전끼리의 연결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LG전자는 IFA 2026에서 AI홈 허브 ‘LG 씽큐 온’과 플랫폼 ‘LG 씽큐’를 중심으로 가전과 공간, 서비스를 연결한 AI홈 생태계를 선보였다. ⒸLG전자

LG전자가 IFA 2026에서 선보인 AI홈은 개별 가전의 기능보다 여러 기기가 하나의 생활 안에서 함께 움직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AI홈 허브 ‘LG 씽큐 온ThinQ ON’과 AI홈 플랫폼 ‘LG 씽큐LG ThinQ’을 중심으로 가전과 공간, 서비스를 연결하고 전시장에서는 홈로봇 ‘LG 클로이드’를 지휘자로 내세워 이를 하나의 ‘AI 오케스트라’로 표현했다.

LG전자가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26’에 참가해 집 안 공간과 제품, 서비스를 AI로 연결하는 ‘AI홈’을 선보였다. 모델이 홈로봇 ‘LG 클로이드’의 지휘 아래 제품과 기술, 서비스가 하나의 AI 생태계로 연결되는 모습을 담은 전시 콘텐츠 ‘LG AI 오케스트라’. ⒸLG전자

기존 스마트홈이 흩어진 가전을 한곳에서 제어하는 편리함을 줬다면 AI홈은 그 연결을 생활의 흐름으로 이어간다. LG 시그니처 월 오븐의 ‘고메 AI’는 내부 AI 카메라로 식재료를 인식해 음식에 맞는 조리 모드를 추천하고 냉장고는 사용자의 일상적인 대화를 이해해 필요한 기능을 제안한다. 각각의 가전이 파악한 정보와 상황이 서로 이어질수록 사람은 기기마다 상태를 확인하고 다음 행동을 지시하는 데 신경을 덜 쓰게 된다. 가전 한 대가 똑똑해지는 것을 넘어 집 전체가 한 사람의 하루에 맞춰 움직이는 것. LG전자가 개별 AI 가전보다 ‘AI홈 생태계’를 앞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거지에서 선택지를 덜어내다

G8 Diamond는 식기의 종류와 양을 감지해 세척 코스를 조절하고 세제를 자동 투입해 세척부터 건조까지 알아서 처리한다. ⒸMiele

식기세척기는 집안일을 크게 바꾼 가전이지만 막상 사용해보면 챙겨야 할 것이 꽤 많다. 그릇이 얼마나 찼는지 보고 어떤 종류의 식기가 들어갔는지 살핀다. 냄비나 병이 섞여 있다면 알맞은 프로그램을 고르고 세제와 작동 시간도 챙겨야 한다. 손으로 그릇을 닦는 수고는 줄었지만 세척을 시작하기까지 필요한 판단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독일의 가전 브랜드 밀레Miele가 IFA 2026에서 공개한 ‘G8 Diamond’는 이 과정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내부 카메라와 AI가 식기의 종류와 적재량을 먼저 파악하고 냄비나 병처럼 별도의 관리가 필요한 식기를 발견하면 알맞은 세척 옵션을 적용한다. 여기에 세제 자동 투입과 건조 기능이 이어지고 식기가 일정량 이상 찼을 때 세척을 시작하도록 설정할 수도 있다. 이전에는 그릇을 넣은 뒤 상태를 살피고 프로그램과 세제, 작동 시점을 차례로 정해야 했다면 이제는 식기를 넣는 것만으로 이후 과정의 상당 부분을 가전이 이어받는다. 설거지를 대신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식기세척기를 관리하는 일’까지 줄이는 변화다.

G8 Diamond는 내부 카메라와 AI 기반 이미지 인식을 활용해 식기의 종류와 적재량을 파악하고 세척 과정에 반영한다. ⒸMiele

이런 변화가 반가운 이유는 가전이 편리해지는 동안 사용법은 오히려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더 세밀한 기능이 추가될수록 사용자가 알아야 할 설정과 선택지도 함께 늘었다. 밀레에 따르면 자사 세탁기의 프로그램과 온도, 탈수 속도, 추가 옵션, 세제 투입 방식을 조합하면 가능한 설정은 100만 가지가 넘는다. 원하는 방식으로 세탁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진 만큼 매번 무엇을 고를지 결정해야 하는 과정도 따라왔다. 밀레의 세탁 콘셉트 ‘Cary’는 이 많은 선택을 다시 가전 안으로 가져온다. 광학 센서와 AI가 직물의 종류와 색상을 파악해 알맞은 세탁 과정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사용자가 새로운 기능을 하나 더 익히는 대신 가전이 이미 갖춘 기능 가운데 지금 필요한 것을 알아서 고른다. 결국 AI가 만드는 편리함은 기능을 계속 더하는 데 있기보다 그 많은 기능을 사람이 일일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데 있다. 가전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사용자가 신경 쓸 일은 적어지는 것. G8 Diamond와 Cary가 보여주는 변화의 방향도 여기에 있다.

온도와 시간은 오븐에게 맡긴다

오븐 요리를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오븐을 켜는 것은 아닐 때가 많다. 레시피를 검색하고 알맞은 온도와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 먼저다. ‘180도에서 20분’이라는 숫자를 알아낸 뒤에야 오븐 앞에서 조리를 시작할 수 있다. 독일의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지멘스Siemens의 ‘iQ700 studioLine 오븐’은 이 순서를 바꾼다. ‘Food Recognition’ 기능은 내부 카메라로 최대 100가지 요리를 인식한다.

Siemens iQ700 studioLine 오븐은 내부 카메라와 AI로 최대 100가지 요리를 인식하고 가열 방식과 온도, 조리 시간을 제안한다. ⒸSiemens

음식을 넣고 문을 닫으면 카메라가 메뉴를 확인한 뒤 가열 방식과 온도, 조리 시간을 제안한다. 사용자는 제안된 내용을 확인해 그대로 진행하거나 필요에 따라 설정을 바꾼다. 피자나 빵처럼 굽기 정도가 중요한 음식은 원하는 수준을 정하면 카메라가 조리 상태를 살피고 목표한 결과에 도달하면 오븐이 자동으로 작동을 종료한다. ‘Home Connect 앱’에서는 조리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설정을 조절할 수 있다.

조리 중에는 Home Connect 앱을 통해 음식의 상태와 굽기 정도를 확인하고 조절할 수 있다. 원하는 굽기 정도에 도달하면 오븐이 자동으로 작동을 종료하고 알림을 보낸다. ⒸSiemens

기능만 놓고 보면 온도와 시간을 자동으로 맞춰주는 오븐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면 사람과 가전이 대화하는 방식이 바뀐 사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음식에 맞는 조리법을 알아낸 뒤 온도와 시간이라는 숫자로 바꿔 오븐에 전달했다. 이제는 오븐이 먼저 안에 들어온 음식이 무엇인지 살핀다. 사람이 기계의 언어를 익혀야 했던 과정이 한 단계 줄어든 것이다. 가전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각종 기능과 설정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다면 AI 가전이 익숙해진 집에서는 그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 사용자가 가전을 잘 알아야 하는 대신 가전이 사용자의 상황을 더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Editor’s Comment

집안일에는 눈에 보이는 노동만큼 계속 기억하고 챙겨야 하는 일도 많다. 빨래를 언제 돌릴지 정하고 냉장고 속 재료를 확인해 끼니를 계획하는 것처럼 사소한 판단이 하루 곳곳에 남아 있다. AI가 바꾸려는 것은 이처럼 집안일에 따라붙던 ‘관리’의 과정이다. 해야 할 일을 일일이 떠올리고 방법을 고르지 않아도 된다면 그만큼 집에 쓰던 시간과 신경을 다른 곳에 돌릴 수 있다. 퇴근 후 저녁 메뉴부터 고민하거나 외출하면서 켜둔 가전이 없는지 되짚어보는 순간도 줄어든다. 빨래와 설거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집안일이 하루의 할 일 목록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작아지는 것이다. 가전이 노동을 대신해 온 다음 단계는 이렇게 집안일을 덜 의식하게 만드는 데 있다.

물론 알아서 움직이는 가전이 많아진다고 곧바로 편안한 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생활 방식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필요할 때 사람이 쉽게 개입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그래서 앞으로 AI 가전의 편리함은 기능의 수보다 일상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지에 달려 있다. 매번 존재를 의식하고 사용법을 익혀야 하는 기술보다 필요한 순간 먼저 움직이고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기술에 가까워지는 것. 최근 AI 가전이 보여주는 변화는 결국 더 많은 일을 해주는 집보다 사람이 집을 관리하느라 쓰던 시간과 신경까지 덜어주는 집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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