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젖히니 눈이 내린다. 도쿄에서 눈을 보는 건 꽤 귀한 일이라는 걸 안다. 게다가 눈발이 드넓은 요요기 공원 위로 쏟아지고 있으니, 이른 아침이지만 센티멘털해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난 호텔 트렁크 요요기 파크 꼭대기 층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이 방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높이에 있지만, 이상하게도 위압적이지 않다. 오너 스위트룸에 머무는 상태는 호화로움보다는 잠시 동안의 은신에 가깝다. 감각의 과부하와 고즈넉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 도시에서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기억을 만든다. 서울을 떠나오며 내가 품은 꿈은 도쿄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공원과 가장 가까운 호텔

트렁크 요요기 파크는 그 이름처럼 요요기 공원과 바로 맞닿아 있다. 얼마나 가까우면, 엘리베이터 1층 버튼 옆에 ‘Big Gym’이라고 공원을 유머러스하게 표기할 정도다. ‘어반 리처지Urban Recharge’라는 호텔의 테마는 결국 이 공원의 정서와 풍경에 상당 부분을 기대고 있는 셈이다. 봄의 벚꽃과 가을의 재즈 페스티벌로 도쿄를 아련하게 수놓는 요요기 공원을 앞마당처럼 두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아침마다 줄이 늘어서는 나타 데 크리스티아노Nata de Cristiano의 에그타르트 같은 소소한 즐거움, 문 앞의 카페 푸글렌Fuglen과 그릇 가게 로스트앤파운드Lost And Found의 정감 어린 취향이 이 호텔을 생기 있는 로컬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밀어 넣는다.

2023년 문을 연 트렁크 요요기 파크의 건축과 인테리어는 도쿄 기반의 게이지 아시자와Keiji Ashizawa Design와 덴마크의 놈 아키텍츠Norm Architects의 결합으로 도쿄적 감성과 소프트 미니멀리즘이 어우러진다. 거친 콘크리트 표면을 드러낸 박스형 건물에 25개의 객실이 자리하고, 외벽 테라스가 자연스럽게 모듈을 만들어내 리듬감을 자아낸다.



묵고 있는 오너 스위트 룸은 건물 꼭대기 층을 모두 쓰는 펜트하우스형 객실이다. 밝은 오크 벽으로 침실과 거실을 구획하고, 기다란 욕실은 발코니로 향해있는 커다란 욕조와 나부끼는 화이트 커튼으로 마무리된다. 복숭아색 크바드라Kvadrat로 감싼 아우도Audo의 이브Eeve 모듈러 소파, 아리아케Ariake 라운지체어는 덴마크에서 몰고 온 놈 아키텍츠의 따듯한 질감을 표현한다. 스칸디나비아의 차분한 선과 일본식 미감은 이케바나처럼 여백을 남긴 채,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
머무는 시간을 설계하는 그림과 책

객실 곳곳에 걸린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욕실에 걸린 료스케 테라이Ryosuke Terai의 <Order>라는 초현실적인 그림이 놀이터에서의 내 유년시절을 건드린다. 객실과 라운지, 레스토랑까지 호텔 내 모든 작품은 구매할 수 있다고 일러준 직원의 말이 생각났다. 그림과의 인연은 쉽지는 않지만, 대개는 설명보다 감각이 먼저 닿는다. 최근의 디자인 호텔들은 절묘하게 아트를 들이민다. 우리 집에 걸게 된다면 어디에 둘까? 저 그림이 계속해서 애틋하게 느껴질까? 수없이 그림 앞에 서보기를 반복하다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젯밤에 읽던 책들이 베개 맡을 구른다. 호텔이 마련해 둔 책은 늘 유심히 살피는 편이다. 객실에도 여섯 권의 책이 벽 선반에 놓여 있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여섯 권이란 첨예한 고민으로 골라냈음을 뜻한다. 그러니 더 넘겨보지 않을 수 없다.

호텔은 라이브러리나 북셀렉션을 통해 스스로 어떤 리듬과 취향을 지녔는지 조용히 드러낸다. 호텔을 설계한 게이지 아시자와의 <On honest design>, <Yoyogi National Gymnasium and Kenzo Tange>. 아시자와의 책은 콘크리트가 갖는 질감의 정직성을 말하고 있고, 어제 택시를 타고 오면서 본 요요기 국립 경기장은 겐조 단게의 건축 중에서 가장 유려하고 강렬했다. 머물고 있는 ‘지금, 이곳’의 맥락에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책들을 넘기며 늘 한 박자 앞서 있는 호텔의 감각을 실감한다. 투명한 전면 창은 자꾸만 시선을 밖으로 이끈다. 설경 위로 얇게 김이 오르던 수면을 떠올리니, 문득 이 아침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속에서 눈 덮인 도쿄를 보다

스위트룸 게스트에게만 허용된 계단의 비밀 문을 슬며시 밀어 연다. ‘Take Me Home’이라고 적힌 플립플롭에 얇은 가운만 걸쳐 입고 내려간 곳은 호텔의 핵심인 트렁크 풀 클럽. 야외의 환상적인 인피니티 풀이 하늘 아래 수면을 드러낸다. 이른 아침이지만 몇 명의 투숙객이 이 보기 힘든 도쿄의 설경을 보러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모두 시선을 저만치 멀리 두고 각자의 고요 속에 머문다. 요요기 공원의 끝없는 수목이 이상적인 높이에서 수평으로 펼쳐진다. 그새 눈은 그쳤지만, 쌓인 눈이 아직 나무 끝에 남아있다. 물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야를 가리는 난간이나 스크린 없이 오롯이 도쿄의 공기를 대면할 수 있는 풀이라니! 따듯한 물의 촉감, 코로 들어간 청량한 2월의 공기가 온몸을 관통한다. 이 순간만큼은 여행도, 일상도 아닌 채로 그저 ‘머무는 중’이다. 커다란 쪽빛 스위밍 풀과 따스한 거품이 일렁이는 자쿠지, 둘 중 어디서든 고개를 찬찬히 돌리면 요요기 공원과 그 너머의 스카이라인이 한 편의 파노라마로 열린다.

느긋한 아침 수영을 마치고 풀사이드 바로 들어가 늦은 조식을 했다. 반듯한 봉투에 넣어 전해준 메뉴 페이퍼를 편지처럼 천천히 읽었다. 달콤한 각성이 필요했다. 카라멜 넛 소스와 과일을 곁들인 팬케잌과 카모마일티를 주문했다. 직원은 나타 데 크리스티아노NATA de Cristiano에서 공수한 에그타르트를 먼저 맛보라고 건넨다. 그레이 울 팬츠에 카키 셔츠를 입은 직원에게 컬러와 질감이 멋지다고 칭찬하니, 트렁크의 모든 직원은 투모로우랜드Tomorrowland의 옷을 착용한다고 했다. “우리 호텔은 질감을 중요하게 여겨요. 외벽의 거친 콘크리트부터 가구 패브릭, 와시 조명 그리고 직원들이 입는 옷까지 스펙트럼을 넓게 포용하죠.” 기분좋게 달달하고 부드러운 팬케잌을 입에 넣고, 뜨거운 카모마일로 몸을 데웠다. 테이블 한쪽에는 호텔 주변의 카페와 숍, 오래된 목욕탕까지 귀엽게 그려 넣은 네이버후드 맵이 놓여 있었다. 종이를 펼치자, 이 동네를 걷는 속도와 방향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어디를 가야 할지 정해주기보다, 오늘의 기분에 맡겨 동선을 상상하게 만드는 지도다. 트렁크 팀이 이 호텔을 넘어 동네 전체를 하나의 경험으로 엮어내는 방식이 이렇게 사소한 곳에서 드러난다. 트렁크 요요기 파크는 격식이 없는 듯하면서 서비스와 감각, 속도와 맛까지 모든 것이 섬세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힙’이라는 말보다 먼저, 이곳은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도쿄에 뿌리내린 창조성이 겹겹이 포개져, 이곳은 잠시 머무는 호텔이 아니라 하루의 리듬을 다시 조율해 주는 하나의 좌표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