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잠시 다른 꿈을 허락하는 집, 가평 아시 하우스

두 번째 책을 마친 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더 먼 여행이 아니라 조용한 머무름이었다. 명지산 자락 아래 놓인 아시하우스에서 나는 자연과 공간, 그리고 문장에 천천히 다시 닿는다. 이미 충분했던 세계를 새롭게 감각하는 일, 그 느린 연습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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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다른 꿈을 허락하는 집, 가평 아시 하우스

두 번째 책을 마친 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더 먼 여행이 아니라 조용한 머무름이었다. 명지산 자락 아래 놓인 아시하우스에서 나는 자연과 공간, 그리고 문장에 천천히 다시 닿는다. 이미 충분했던 세계를 새롭게 감각하는 일, 그 느린 연습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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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다른 꿈을 허락하는 집, 가평 아시 하우스

두 번째 책을 마친 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더 먼 여행이 아니라 조용한 머무름이었다. 명지산 자락 아래 놓인 아시하우스에서 나는 자연과 공간, 그리고 문장에 천천히 다시 닿는다. 이미 충분했던 세계를 새롭게 감각하는 일, 그 느린 연습에 관하여.

서울을 벗어나 국도 46번을 달리기 시작하자 산들이 서서히 우리를 에워싼다. 차의 속도에 맞춰 푸른 산세가 부드럽게 포옹하듯 이어진다. 산자락이 도로와 더 밀착될 무렵에는 거친 물살을 토해내며 흐르는 하천까지 여정에 합류한다. 큰비가 지나간 뒤의 물길은 폭포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고, 그 위로 신비로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도시를 벗어났음이 자명해진다. 경기도 가평까지 나왔을 뿐인데, 보이는 것과 들리는 소리, 그리고 공기 속에 섞인 냄새마저 모두 자연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다.

산 아래의 투명한 집

ⒸASI House

아시 하우스ASI HOUSE는 해발 1,200미터에 이르는 명지산 자락 아래, 여러 개의 봉우리가 겹겹이 감싸안은 자리에 놓여 있다. 반듯하고 넓은 단층 건물은 절묘한 위치 덕분에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존재해 온 듯한, 영속적인 인상을 남긴다. 여행이 아니더라도 스테이를 찾는 이유는 종종 이렇게 사소하거나 즉흥적이다. 두 번째 책 집필을 힘겹게 마친 나에게 절실했던 건 들뜬 이동이 아니라 차분한 머무름이었다. 오전까지 수정 원고를 보내느라 머릿속은 과부하 상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속에 나를 가두고, 선선히 흘려보내며, 동시에 일상의 생기로운 리듬을 다시 불러올 수 있는 시공간. 그런 영감을 품은 장소가 필요했다.

ⒸSunyoung Park

아시하우스로 들어서는 마을 입구는 정겨운 시퀀스를 그린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언덕길 옆으로 생생한 계곡이 흐르고, 몇 채의 집들이 단란하게 모여 있다. 투숙객의 도착 시간에 맞춰 넓은 대문은 환영의 제스처처럼 활짝 열려 있다. HOUSE A와 HOUSE B, 두 채의 집을 품은 글라스하우스가 파란 하늘을 고스란히 반사하며 투명하게 빛난다. 견고한 콘크리트 구조체는 회색의 수평선이 되어 산의 풍경을 가로지른다. 푸른 대지 위에 길게 누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판스워스 하우스와 필립 존슨의 글라스 하우스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실제로 아시하우스는 1940년대에 지어진 미국 땅의 저 이상적인 집들에서 영감받아 지어졌다.

썬베드에는 앉지 않아도 된다

ⒸASI House

유리로 둘러싸인 집은 개방성과 과감함, 그리고 신중함이 동시에 배어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투명한 개방감은, 그 모든 대상이 자연일 때 오히려 내밀한 감각과 겹친다. 바깥을 향해 열려 있으되, 쉽게 침범할 수 없는 고요가 그 안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낮은 담벼락 왼편, ‘House A’라 적힌 문을 열고 들어선다. 넓은 잔디를 따라 조성된 진입로 옆에는 새하얀 선베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호퍼의 그림에서 보았을까? 선베드라는 특수한 의자가 앉는 기능보다는 어떤 상황을 촉발할 것만 같은 신호처럼 보인다. 열쇠를 돌려 열고 집의 한가운데로 들어서면, 반쯤 열린 흰 커튼 너머 유리 벽 가득 초록빛이 걸려 있는 극적인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바람결에 천천히 기울어지는 나뭇잎, 저마다 다른 흐름으로 뻗어나가는 얇은 가지들, 먼지처럼 가벼이 떠다니는 나비들, 간신히 뾰족함을 드러낸 산의 꼭대기. 잘 가꿔진 공간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응당 머물러야 할 곳과 마침내 합일되었음을 실감하는 자리다.

서두르지 않은 취향

ⒸASI House

이제야 방 안 이곳저곳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중앙에 놓인 원형 티크 테이블에는 빨갛고 노란 마카롱과 잘 익은 복숭아가 놓여 있다. 테이블을 둘러싼 우아한 의자들, 창가의 널따란 데이베드, 노오란 빛으로 온화한 구심을 만들어내는 플로어 램프의 나직한 키가 정답다. 벽을 세워 만든 키친은 불그스름한 나무 빛의 그릇장과 매달린 월 램프 하나가 오묘한 비례를 그린다. 조화롭게 섞여 있는 스칸디나비안, 프랑스, 미국의 빈티지 가구들은 주장이 강하지 않고 작게 말을 건네는 쪽에 가깝다. 누군가를 닮아 있는 듯한 조합, 체크인 할 때 잠깐 인사를 나눈 아시하우스 호스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호텔에 비해 스테이는 취향이 더욱 진하게 묻어난다. 많은 객실을 조율해야 하는 호텔과 달리 한두 개의 객실로 운영되는 스테이엔 누군가의 자아와 열망을 더욱 한껏 새겨넣을 수 있기에. 스테이의 매력은 여기서 출발한다.

아시하우스를 꾸려가는 젊은 부부도 그들이 지나온 경험과 사색과 감각을 이 깊은 ‘산 아래의 집’에 실현했을 것이다. 욕실의 수전과 샤워기, 스테인리스 화병조차 예사롭지 않아 호스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언젠가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예쁜 걸 발견할 때마다 모아왔어요. 전에 살던 아파트의 방 하나가 그 보관소였죠.”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 배치와 어울림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했다.

카뮈가 일러준대로

ⒸSunyoung Park

섬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매월 그들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머무는 시간을 다독인다. Robert Elovsson의 ‘After Hours’, The Zenmenn & John Moods의 ‘Out Of My Mind’가 초록이 선명해지는 늦은 오후를 훑고 지나간다. 선반 위 여기저기, 책장에 빼곡한 책 중에 몇 권을 무작위로 골라 펼쳤다. 판형이 큰 책들은 우아한 손짓으로 느리게 넘기는 묘미가 있다. 식물의 몸짓이 인간의 초상처럼 다가온 이모젠 커닝햄Imogen Cunningham의 <Flora>, 형태보다 생의 태도가 먼저 읽히는 도예가 루시 리Lucie Rie의 작품집.

ⒸSunyoung Park

그러다 아무 기대 없이 펼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결혼·여름>의 페이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산이나 하늘, 바다도 어떤 새로운 기운을 입어 변모를 겪을 필요가 있다. 단지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보기만 해도 세계가 새롭게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고 감탄해야 할 터인데 사람들은 너무 빨리 싫증이 난다고 불평을 한다.”  문장은 오래 머물렀다. 새로 보는 것의 불가능성을 비집고 나아갈 용기와 마음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처럼.

텃밭에서 온 아침

아침. 마당과 정원을 가로질러 글라스하우스 맞은편 건물로 향한다. 넓은 마당을 저만큼 가로지르면 호스트가 준비해 준 조식을 먹을 수 있는 아늑한 카페가 있다. 그린라이트 그라스가 햇빛을 머금은 채 가늘게 흔들리고, 탐스럽게 고개를 떨군 흰 수국 사이로 붓들레아와 에키네시아가 여름의 기세를 뽐낸다. 미역취와 톱풀이 낮게 번지며 바닥의 리듬을 만들고, 텃밭에는 바질, 루콜라, 오이가 바지런히 자란다.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 정원을 깨웠을 부지런한 공기가 그사이를 천천히 떠돈다. 스페인 시골의 작은 식당을 닮은 카페. 석재 타일이 둘린 벽난로, 분재가 놓인 창가 옆 테이블에 앉았다. 방금 텃밭에서 온 토마토와 바질로 만든 콜드 파스타와 바질 감자샐러드가 새하얀 플레이트에 그림처럼 실려 차려졌다. 차갑고 얇은 파스타의 산뜻한 산미가 아침의 감각을 부드럽게 깨우고, 바질 페스토로 버무린 감자샐러드는 묵직한 중심을 잡아준다. 화려하지 않지만 성급하지도 않은 조합, 이 집이 모든 선택에서 취하는 태도와 닮았다.

ⒸSunyoung Park

아시하우스에서의 머무름은 무언가를 더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충분했던 것들을 다시 느끼는 과정에 가깝다. 이곳까지 오던 길에 만발했던 모든 것들, 음악, 책, 음식, 그리고 나에게 도달한 산세의 위용과 지워지지 않을 색채까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세계를 다시 보는 일. 카뮈의 문장처럼, 그것만으로 나는 잠시나마 다른 꿈을 꾸어본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산 아래의 집은 조용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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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다른 꿈을 허락하는 집, 가평 아시 하우스

05

공원과 수영장 사이에 맡긴 하루, 도쿄 트렁크 요요기 파크

04

런던의 한밤과 아침 사이, 런던 하프 문

03

뾰족한 지붕들 아래 숨겨진 집, 안트베르펜 줄리앙

02

구름 속에 머문 시간, 도쿄 친잔소

01

Prologue 수필이 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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