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ial

찰나의 실재가 빚어낸 초현실의 미학

요즘은 명령어 한 줄이 실제 같은 이미지를 즉각 배달하는 시대. 하지만 1970년대 런던의 외곽에서는 한 남자가 실제로 몸을 불태우고 있었고, 영국의 어느 해변에는 700개의 철제 침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으며, 하늘에는 9미터짜리 거대 분홍 돼지가 비행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픽셀의 조합이 아닌, 인간의 의지 하나로 이루어낸 ‘실제 사건’이었다. 이미지 너머의 밀도를 통해 스톰 소거슨은 결코 렌더링할 수 없는 ‘진짜’를 일찍이 증명해 냈다.

Editorial

찰나의 실재가 빚어낸 초현실의 미학

요즘은 명령어 한 줄이 실제 같은 이미지를 즉각 배달하는 시대. 하지만 1970년대 런던의 외곽에서는 한 남자가 실제로 몸을 불태우고 있었고, 영국의 어느 해변에는 700개의 철제 침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으며, 하늘에는 9미터짜리 거대 분홍 돼지가 비행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픽셀의 조합이 아닌, 인간의 의지 하나로 이루어낸 ‘실제 사건’이었다. 이미지 너머의 밀도를 통해 스톰 소거슨은 결코 렌더링할 수 없는 ‘진짜’를 일찍이 증명해 냈다.

Editorial

찰나의 실재가 빚어낸 초현실의 미학

요즘은 명령어 한 줄이 실제 같은 이미지를 즉각 배달하는 시대. 하지만 1970년대 런던의 외곽에서는 한 남자가 실제로 몸을 불태우고 있었고, 영국의 어느 해변에는 700개의 철제 침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으며, 하늘에는 9미터짜리 거대 분홍 돼지가 비행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픽셀의 조합이 아닌, 인간의 의지 하나로 이루어낸 ‘실제 사건’이었다. 이미지 너머의 밀도를 통해 스톰 소거슨은 결코 렌더링할 수 없는 ‘진짜’를 일찍이 증명해 냈다.

*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초현실 너머의 프로덕션: 0.013초를 붙잡는 아름다움

런던 외곽의 스튜디오, 한 남자의 재킷 소매에 불이 붙는다. 불길은 어깨를 타고 올라가지만,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른 남자와 악수하고 그 순간 셔터가 눌린다. 이 장면은 합성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그렇게 촬영된 사진에서는 불에 탄 수염 냄새가 배어 나올 것만 같다. 힙노시스Hipgnosis의 스톰 소거슨Storm Thorgerson은 상상을 구현하기 위해 기꺼이 불편과 위험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앨범 커버를 넘어, 인간의 노동에 우연이 개입하여 만들어낸 찰나의 기록이었다.

프리즘을 통해 분해된 해석의 공간: <The Dark Side of the Moon>

Pink Floyd, Dark Side of the Moon (1973) ⒸHipgnosis Ltd.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와의 협업은 그 중심에 있다. 이들의 관계는 고용주와 작업자를 넘어선 하나의 미학적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1973년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프리즘 커버는 소거슨의 작업 중 가장 단순해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상징성을 띤다. 검은 배경 위, 정삼각형의 유리 프리즘을 통과하며 무지갯빛으로 분해되는 이 이미지는 해당 앨범의 음악만큼이나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명작이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커버가 소거슨의 작업 중 드물게 순수 그래픽으로 완성된 사례라는 점으로 소거슨은 밴드의 라이브 조명 연출과 가사의 맥락을 철저히 분석한 끝에 이 상징을 도출해 냈다. 그는 시각 정보를 최소화함으로써, 청취자가 음악 속으로 깊이 침잠할 수 있는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실연으로 증명한 뜨거운 소외: 《Wish You Were Here》

Wish You Were Here (1975) ⒸStormthorgerson

1975년 작 《Wish You Were Here》에 이르러 소거슨의 방법론은 본격적인 물리적 실재성을 획득한다. 앨범 제목인 ‘네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서늘한 부재를 암시하지만, 소거슨은 이를 역설적이게도 ‘뜨거운 불길’이라는 시각적 충격으로 치환했다. 한 사람의 몸에 실제 불을 붙이는 위험천만한 실험은 무려 15회가 넘는 사투 같은 테이크 끝에 비로소 단 한 컷의 이미지가 포착되었다.

이 이미지의 미학적 정점은 앨범 제목이 지닌 차가운 소외와 사진 속 인물이 뿜어내는 뜨거운 온도의 선명한 대비에 있다. 소거슨은 부재와 소외라는 관념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보는 이의 망막에 타오르는 불길의 불편한 온도를 직접 투사했다. 악수를 나누는 지극히 일상적인 동작 위로 번지는 화염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마음의 화끈거리는 상실감을 물리적 실체로 증명해 낸다. 그는 상징을 인위적으로 깎아 만드는 대신, 상징이 폭발하듯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을 먼저 설계함으로써 ‘실재하는 초현실’을 완성했다.

700개의 침대가 만든 기적: 《A Momentary Lapse of Reason》

A Momentary Lapse of Reason (1987) ⒸStormthorgerson

그의 집요함이 미학적 정점에 달한 순간은 1987년 《A Momentary Lapse of Reason》 작업이었다. 그는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침대의 행렬’이라는 초현실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영국의 한 해변에 실제 침대 700개를 일렬로 배치하는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현장은 그야말로 자연과의 사투였다.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면 700개의 침대를 일일이 해변 밖으로 옮겼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정해진 위치에 배열하기를 반복하는 고된 공정이 이어졌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포토샵이나 CGI로 단 몇 시간이면 매끄럽게 합성해 낼 수 있는 장면이었기에, 이러한 수고로움은 지금에서 따지면 비효율의 극단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거슨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썰물 직후 드러난 젖은 모래의 축축한 질감, 그리고 낮은 각도의 햇살이 700개의 침대 사이사이에 드리우는 실제 그림자의 깊이였다. 그는 데이터가 계산해 낸 가상의 명암이 아니라, 실제 대기와 빛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물리적 중력’을 원했다. 이 지독한 수고스러움 속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수백 명의 스태프가 침대를 나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모래 위에서 보낸 그 ‘시간’ 자체가 이미지에 밀도를 부여한다는 믿음이다. 완성된 커버 속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규모가 주는 압도적인 실재감을 마주하며,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낀다.

하늘을 가로지른 돼지, 이미지의 진실성: 《Animals》

런던 배터시 발전소(Battersea Power Station) ⒸStormthorgerson

1977년 작 《Animals》의 커버 작업은 소거슨이 추구한 ‘실재의 미학’이 통제 불가능한 우연과 충돌했을 때, 그 실패마저 어떻게 작품의 전설이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산업화의 잔해 같은 런던 상공에 9미터가 넘는 거대한 헬륨 돼지 풍선 ‘알지Algie’를 띄우기로 했다. 가공된 그래픽이 아닌, 실제 거대한 생명체가 도심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현장은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촬영 둘째 날, 예기치 못한 강풍에 돼지를 붙들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유를 찾은 핑크빛 돼지는 히스로 공항의 비행 항로를 가로질러 켄트주까지 날아갔고, 이 황당하고도 초현실적인 사건은 실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온 영국을 뒤흔들었다.

결과적으로 최종 커버는 첫날 찍은 발전소 사진에 돼지를 합성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실사’를 꿈꿨던 그의 계획은 기술적 합성을 통해 마무리된 셈이다. 그러나 소거슨은 이를 실패라고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대한 물체를 실제로 하늘에 올리기 위해 분투했던 사투, 로프가 끊어질 때의 당혹감, 그리고 하늘로 사라진 돼지가 시민들의 목격담으로 살아남아 ‘사건’이 된 과정 자체에서 이미지의 진실성을 찾았다.

일대일 대면이 아닌 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열린 문’

Atom Heart Mother Ⓒ핑크 플로이드 앨범

밴드의 얼굴을 커버에 담지 않는 것은 그의 확고한 철칙이었다. 1970년 작 《Atom Heart Mother》가 대표적이다. 앨범 제목도, 밴드 이름도 없이 들판을 바라보는 암소 한 마리만 덩그러니 놓였다.

 소거슨은 청자가 정답을 찾기보다 스스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길 원했다. 우리 뇌는 눈으로 보는 이미지와 귀로 듣는 음악을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려는 본능이 있다. 이때 시각 정보가 너무 구체적이면 뇌는 인지 작용을 금방 끝내버린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이미지를 마주하면, 뇌는 그 빈틈을 채우기 위해 바빠진다.

Tree of half life ⒸStormStudios.

음악을 들으며 개인의 기억과 감정, 상상력을 총동원해 이미지와 연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앨범 표지는 단순한 ‘포장지’가 아니다. 음악과 청자의 내면이 만나는 ‘사건의 장’이다. 소거슨은 아트워크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가 아티스트가 만든 세계를 구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해석으로 그 세계를 완성해 가는 거주자가 되길 제안했다.

0.013초를 붙잡는 ‘Behind the scene’의 미학

스톰 소거슨(Storm Thogerson), 오브리 포 파월 (Aubrey Po Powell)  ⒸHIPGNOSIS LTD

오늘날 이미지를 ‘생성’하는 일은 가볍고 쉽다. 하지만 수많은 이미지 중 어떤 것이 우리 마음에 남을까? 현대인은 매일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하는 스크롤을 내려가며 수천 장의 이미지를 마주한다. 시각 예술의 역사는 바로 그 찰나의 속도를 멈춰 세우기 위한 사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ink Floyd’s Delicate Sound of Thunder (1988)

최근 AI 이미지의 윤리나 저작권이 논란이 되는 바탕에는 ‘과정의 실종’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클릭 한 번으로 얻은 결과물은 매끄럽고 화려하지만, 그 속에는 창작자가 현실의 한계와 부딪히며 겪은 치열한 고민이 빠져 있다. 반면 소거슨의 작업이 오늘날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통과했던 그 ‘고단한 과정’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700개의 침대를 일일이 옮기고, 불타는 스턴트맨을 보며 기도하고, 도망간 돼지 풍선을 추격하던 그 비효율적인 시간이 이미지 속에 보이지 않는 중력으로 남아 있다.

예술의 위대함은 최종 결과물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쏟은 고민의 시간, 수많은 실패, 예기치 못한 우연들이 겹겹이 쌓여 이미지에 가치를 부여한다. 소거슨은 우연과 실수라는 인간적인 흔적을 기꺼이 섞어 ‘실재하는 초현실’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풍경은 지금의 기술력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결과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로프가 끊길 때의 당혹감이나 젖은 모래 위에서 떨었던 기억 같은 생생한 현장감은 결코 컴퓨터로 렌더링할 수 없는 영역이다.

The Mars Volta – Frances The Mute ⒸFrances the Mute

요즘 같은 찰나의 시대에 소거슨의 사진이 가지는 의미는 우리를 멈춰 세우기 때문이다. 이미지 속에 담긴 바람과 열기는 ‘진짜’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판단이 희미해져 가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그의 작업을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기꺼이 고단한 길을 걸어갔던 숭고함과 인간의 의지가 남긴 그 뜨거움 때문일 것이다. 그 수고로움을 속에 깃든 가치를 위해, 우리는 여전히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있으므로.

14

찰나의 실재가 빚어낸 초현실의 미학

13

아름다운 제약, 상상력을 붙잡아두는 창조의 도구

12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법, 움베르토 에코의 웃음

11

오카자키 쿄코와 도시적 에로티시즘

10

우연이라는 완벽한 질서, ‘우연 연산’

09

노력의 흔적을 지우는 기술, 스프레차투라에 대하여

08

미완성과 우연의 초상, 〈휘슬재킷〉

07

악의 미학을 위한 클래식

06

손의 여운, 사물이 살아 있는 시간: 루시엔 데이와 마가렛 호웰

05

첫 권의 문학: 세계를 여는 방식에 대하여

04

연옥 단계의 클래식

03

호모 콜렉투스 – MoMA가 수집한 사물들

02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시지프의 유머

01

조지아 오키프와 마이크로 뷰티

00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