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ion

작품 너머의 삶을 품은, 한국 현대미술 거장의 공간 4

단색화를 대표하는 윤형근과 박서보, ‘물방울 화가’ 김창열, 추상 조각의 지평을 넓힌 최만린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한 시대를 만든 네 예술가의 삶과 작업이 깃든 공간을 찾았다. 그들이 머물고, 사유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일궈낸 자리에서 작품 너머의 삶과 흔적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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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너머의 삶을 품은, 한국 현대미술 거장의 공간 4

단색화를 대표하는 윤형근과 박서보, ‘물방울 화가’ 김창열, 추상 조각의 지평을 넓힌 최만린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한 시대를 만든 네 예술가의 삶과 작업이 깃든 공간을 찾았다. 그들이 머물고, 사유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일궈낸 자리에서 작품 너머의 삶과 흔적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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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너머의 삶을 품은, 한국 현대미술 거장의 공간 4

단색화를 대표하는 윤형근과 박서보, ‘물방울 화가’ 김창열, 추상 조각의 지평을 넓힌 최만린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한 시대를 만든 네 예술가의 삶과 작업이 깃든 공간을 찾았다. 그들이 머물고, 사유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일궈낸 자리에서 작품 너머의 삶과 흔적을 들여다 본다.

최근 몇 달 사이,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공간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지난 5월 김창열이 30여 년간 살며 작업한 평창동 자택이 ‘김창열 화가의 집’으로 공개된 데 이어, 8월에는 박서보가 말년까지 작업한 연희동 공간 곁에 박서보 미술관이 들어섰다. 이달 1일에는 윤형근이 40년 가까이 거주하고 그림을 그렸던 서교동의 붉은 벽돌집이 ‘윤형근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관람객을 맞았다. 이 같은 흐름을 일찍이 보여준 곳이 2020년 개관한 최만린 미술관이다. 조각가 최만린이 30년간 생활하고 작업한 집의 모습을 간직한 채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네 공간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작품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작업실과 가구, 손때 묻은 도구와 일상의 자취까지. 한 사람의 예술이 만들어진 자리에서 작품만으로는 미처 읽지 못한 작가의 시간을 만나본다.

절제와 여백의 미, 윤형근의 집

윤형근이 남긴 말 가운데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는 문장이 있다.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삶을 담담히 바라보는 이 말은 그의 절제된 그림이 자아내는 고요한 숭고함과도 어딘가 닮았다. 윤형근은 푸른색과 짙은 갈색 물감을 섞어 거의 검게 보이는 ‘청다색’을 만들고, 묽은 물감이 천에 스며들도록 여러 번 칠했다. 그렇게 화면에는 굵은 기둥 같은 색 면과 그 사이의 넓은 여백만 남는다. 색을 더하는 동시에 형태는 덜어내며, 삶과 자연, 시간에 대한 사유를 간결한 조형 언어로 압축한 것이다.

지난 9월 1일 대중에 처음 공개된 ‘윤형근의 집’은 그가 1967년부터 20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과 함께 살고 작업했던 주택이다. 흥미롭게도 이 서교동 터는 1963년 장인이자 스승인 화백 김환기가 국민주택으로 분양받은 곳이다. 윤형근은 1983년 기존 집을 허물고 건축가였던 동생 윤도근에게 설계를 맡겨 새 집을 지었다. 공간의 쓰임과 형태는 물론 재료까지 직접 살폈다고 한다. ‘흙빛을 정화한 빛깔’의 벽돌과 소나무, 거친 돌이 어우러진 정원은 윤형근의 미감을 잘 보여주는 풍경이다.

자연광 아래서 작업하기 위해 한쪽 벽을 유리창으로 낸 1층 작업실에는 물감 자국이 밴 바닥과 붓, 작업 도구가 생전 모습에 가깝게 남아 있다. 시대별 대표작과 함께 유족 인터뷰 영상, 드로잉과 작가 노트, 서신과 사진을 살펴보다 보면 ‘작가 윤형근’의 시간을 따라 걷는 듯하다. 2층은 한층 사적이다. 가구와 도자기, 오디오부터 추사 김정희의 현판과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조각까지 원래 자리를 지키며 그의 취향과 인연을 드러낸다. 아내이자 화가인 김영숙을 기리는 방에서는 그녀의 그림과 수집품, 김환기와 김향안의 사진과 서신도 만날 수 있다. 작품만이 아니라 가족과 우정, 취향과 일상까지. 윤형근이 말한 ‘예술은 삶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집 전체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집을 둘러본 뒤에는 PKM 갤러리로 발걸음을 이어가도 좋다. 10월 3일까지 열리는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는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주요 작품을 큰 흐름으로 이어 그의 작품 세계를 살핀다. 10월 8일부터 2027년 1월 9일까지는 뉴욕의 저드 파운데이션Judd Foundation에서도 윤형근 초대전이 열린다. 1993년 도널드 저드의 초대로 윤형근 개인전이 열렸던 바로 그곳에서, 당시 출품작 6점을 다시 한자리에 모은다. 두 예술가의 국제적 교류와 역사적인 만남을 30여 년 만에 재조명하는 자리다.

윤형근의 집

주소 |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21길 19-17

전시 기간 | 2026년 9월 1일 – 2026년 10월 17일
운영 시간 | 화-토요일 11:00 ~ 18:00, 일요일 및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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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과 비움의 수행, 박서보미술관

같은 행위를 수없이 반복하며 자신을 비워낸 단색화의 대가, 박서보. 그의 대표 연작 〈묘법〉은 1967년 시작됐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뒤 연필로 선을 긋고 또 긋는 행위에서 출발해, 물에 불린 한지를 밀어내며 골을 만드는 ‘한지묘법’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단풍과 꽃, 하늘처럼 자연에서 발견한 강렬한 색을 화면으로 끌어들였다. 형태와 색은 달라졌지만 작업의 중심에는 늘 반복이 있었다. 그에게 그림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기보다, 끈임없이 손을 움직이며 자아를 비워내는 수행에 가까웠다.

그가 말년까지 생활하고 그림을 그렸던 연희동 작업실 바로 옆에 지난 8월 박서보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건축가 최문규가 이끄는 가아건축이 설계한 미술관은 지하 2층에서 지상 3층까지 이어지는 약 2,000㎡ 규모다. 눈여겨볼 것은 전시장 사이사이에 자리한 작은 정원이다. 작업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자연에서 되찾곤 했던 박서보의 삶처럼, 건물 곳곳으로 빛과 녹음을 끌어들였다. 그중에서도 3층의 ‘큐브Cube’가 인상적이다. 높이 8m의 정사각형 공간을 반투명 유리로 둘러 자연광이 공간 전체에 은은하게 번지도록 했다.

박서보, 〈묘법〉 Ⓒ박서보미술관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은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해 온 화가 흐엉 도딘Huong Dodinh과 박서보의 회화 42점을 나란히 펼친다. 두 작가의 작업은 정반대에 가깝다. 박서보가 젖은 한지를 반복해서 긋고 밀어냈다면, 흐엉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겹 쌓아 화면 깊숙이 빛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내면으로 향한다는 점에서는 놀랍도록 닮았다. 두 사람이 박서보가 세상을 떠나기 약 3개월 전 처음 만났다는 사실도 특별하다. 흐엉 도딘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가 됐고, 이후 그 만남의 기억하며 작품으로 남겼다.

빛이 쏟아지는 3층 큐브에는 박서보가 생전에 자신의 미술관에 걸고 싶어 했던 거대한 백색 〈묘법〉 세 점이 나란히 서 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업해 미처 서명조차 남기지 못한 작품들이다. 정면에서는 담담한 흰 화면처럼 보이지만, 옆으로 움직이면 한지의 골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번지며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관람료는 5천 원이며, 별도 예약 없이 현장 발권이 가능하다. 평일 오후 2시와 주말 오후 2시 ~ 4시에는 무료 도슨트 투어도 운영된다.

박서보미술관

주소 |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24길 9-54

전시 기간 | 2026년 8월 21일 – 2027년 1월 3일
운영 시간 | 화-일요일 11:00 ~ 18:00,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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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에 새긴 시간, 김창열 화가의 집

Ⓒ플랫폼 건축사

캔버스 위에 금세라도 흘러내릴 듯 맺힌 투명한 물방울. 김창열은 평생 이 단순한 형상을 변주하며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1960년대 앵포르멜Art Informel* 경향의 작업을 거쳐 뉴욕과 파리에서 활동한 그는 1973년 파리 개인전에서 〈물방울〉 연작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려 문자와 이미지를 결합했고, 1980년대에는 캔버스에 직접 한자를 써넣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배운 천자문과 물방울이 한 화면에서 만난 〈회귀〉 연작이다. 작가는 ‘회귀’라는 이름에 자신을 성장시킨 문화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실제보다 더욱 실제처럼 보이도록 치밀하게 그린 물방울은 그렇게 하나의 소재를 넘어 기억과 시간, 사유를 품은 김창열만의 조형 언어가 됐다.

*앵포르멜(Art Informel)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비정형(非定形) 추상미술 운동

지난 5월 28일 문을 연 ‘김창열 화가의 집’은 그가 202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여 년간 가족과 함께 살며 창작 활동을 이어간 평창동 자택이자 작업실이다. 1988년 건축가 우규승의 설계로 완공된 집으로, 생전 작업실을 시민에게 공개하고 싶어 했던 작가의 뜻에 따라 종로구가 자택을 매입해 공공문화시설로 조성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는 생활공간을 새로운 용도에 맞게 재구성하되 작가의 삶과 작업의 흔적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공을 들였다. 1층에는 두 개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기존 생활 공간이던 2층에는 매표소와 카페를 들였으며, 지하 작업실은 작가가 사용하던 모습에 가깝게 되살렸다.

현재 진행 중인 개관전 《김창열, 물방울의 흔적》은 바로 이 장소에 주목한다. 평창동 작업실에서 이루어진 한지와 종이 작업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이어진 물방울 회화의 변화와 종이를 다루는 방식의 변천을 함께 살핀다. 종로구가 소장한 회화 19점과 판화 4점, 드로잉 1점 등 총 24점을 비롯해 대표 연작 〈물방울〉과 〈회귀〉의 밑작업과 완성작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완성된 그림만 바라볼 때는 알기 어려웠던 물방울의 제작 과정과 표현 방식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당초 8월 23일까지 예정됐던 전시는 관람객의 호응에 힘입어 12월 20일까지 연장됐다.

이곳의 백미는 지하 2층 작업실이다. “나는 작업을 위해 빛을 아틀리에 안에 들이지 않는 편이다. 동굴 같은 곳에서 내면의 빛에 의지한다”던 그의 말처럼, 일반적인 창 대신 원형 천창을 통해 은은한 간접광이 스며든다. 난방조차 되지 않아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면 늘 난로에 불을 피웠다고 한다. 붓과 물감, 스케치북과 화구 등 작업 도구와 가구까지 생전의 배치에 가깝게 재현해, 방금 전까지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밝고 투명한 물방울이 이토록 어둡고 고요한 방에서 완성됐다는 사실도 묘한 여운을 남긴다. 관람을 마친 뒤 2층 카페로 오르면 통창 너머로 호젓한 서울의 풍경이 기다린다. 별도의 주차 공간이 없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김창열 화가의 집


주소 | 서울 종로구 평창 7길 74

전시 기간 | 2026년 5월 29일 – 2026년 12월 20일
운영 시간 | 화-일요일 10:00 ~ 18:00,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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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조각가의 시간을 품은 집,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

Ⓒ건축공간연구원

최만린은 한국 현대조각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확장되던 시기를 이끈 조각가다. 1950년대 말 생명의 근원적 형태를 탐구한 〈이브〉 연작을 시작으로, 이후 서예의 필법과 동양 철학에서 조형 언어를 길어 올렸다. 〈천·지·현·황〉과 〈일월〉, 〈천지〉를 거쳐 〈태〉와 〈O〉 연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은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생명과 우주에 깃든 보편적인 형태를 찾아가는 데 있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에서 김종영과 김세중을 사사하고, 훗날 서울대학교 교수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추상조각 세계를 구축했다. 

성북구 정릉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최만린미술관’은 그의 삶과 작업이 실제로 이어졌던 집을 그대로 품고 있다. 최만린이 1988년부터 30년간 작업을 이어온 2층 주택을 성북구가 매입해 미술관으로 조성한 곳이다. 리모델링을 맡은 ‘EMA 건축사사무소’ 이은경 소장은 높은 천장과 계단 등 기존 주택의 구조를 최대한 살리고, 조각가의 작업 공간이 지녔던 분위기를 보존하는 데 집중했다. 집의 높낮이와 동선, 작업실 특유의 개방감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전시를 보는 동시에 최만린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작업하던 방식까지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집: 두 조각가를 잇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거슬러 올라간다. 전시의 출발점은 지금의 미술관이 아니라 최만린이 1963년 직접 설계하고 1965년부터 살았던 또 하나의 ‘정릉집’이다. 그는 이곳에서 동양 사상에 기반한 추상 조형으로의 전환을 시도했고, 1980년 집을 후배 조각가 박병욱에게 넘겼다. 이후 박병욱은 201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같은 집에서 30년간 인체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이어갔다. 전시는 최만린이 이 집에 머문 1965년부터 1980년까지의 주요 추상조각 10점과 드로잉, 박병욱의 대표 조각 15점 등을 함께 펼쳐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두 예술세계가 어떻게 자라났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최만린의 아들이자 건축가인 최아사가 제자들과 함께 재현한 정릉집 모형이다. 사진과 도면, 인터뷰 영상 등 다양한 아카이브를 곁들여 당시의 구조와 분위기를 상상하게 한다. 1996년 병환으로 오른쪽 몸이 마비된 뒤에도 왼손을 훈련해 작업을 이어간 박병욱의 종이 점토 작품과 드로잉 역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한 조각가가 지은 집이 또 다른 조각가에게 건너가 새로운 창작의 토양이 되고, 사라진 뒤 다시 미술관 안에서 기억된다. 이곳에서는 조각만큼이나 ‘집’이라는 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하나의 작품처럼 다가온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네이버 예약과 현장 관람 모두 가능하다.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


주소 | 서울 성북구 솔샘로 7길 23

전시 기간 | 2026년 4월 2일 – 2026년 11월 28일
운영 시간 | 화-토요일 10:00 ~ 18:00, 일요일 및 월요일 휴관
Link |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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