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서울이 가장 거대한 미술관이 되는 시간이 돌아왔다. 세계 유수의 갤러리가 코엑스COEX 안으로 모여드는 동안, 서울 곳곳의 미술관과 갤러리 역시 굵직한 해외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부터 한국 작가의 대규모 전시, 특별한 공간을 무대로 한 기획전까지 저마다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든다. 페어장에서 미술의 가장 뜨거운 현재를 만났다면, 이제 촘촘해진 전시 지도를 따라 서울을 누비며 작품을 조금 더 깊고 느리게 들여다볼 차례다. 프리즈 서울Frieze Seoul과 키아프 서울Kiaf SEOUL 관람 전후로 함께 챙겨볼 전시를 소개한다.
1. 아모레퍼시픽미술관, 《Sol LeWitt: Open Structure》

벽을 가득 채운 선과 색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아이디어’다. 개념미술의 선구자 솔 르윗Sol LeWitt의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 《Sol LeWitt: Open Structure》가 9월 1일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문을 연다. 솔 르윗은 완성된 결과물보다 아이디어와 규칙을 작품의 핵심으로 보며, 현대미술에서 창작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 작가다. 대표작인 ‘월 드로잉Wall Drawing’역시 작가가 남긴 지시문을 바탕으로 제3자가 공간에 맞게 구현하는 방식이다. 작가의 손이 아닌 ‘아이디어’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월 드로잉 13점을 비롯해 구조물과 회화, 사진, 판화, 아카이브 등 총 45점을 선보인다. 특히 국내 미술 전공자 23명으로 구성된 ‘APMA MAKERS’가 솔 르윗 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직접 구현한 월 드로잉도 눈여겨볼 만하다.

2. 프랜시스 갤러리, 《A Full Moon Is a Half Moon》


영국 배스와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의 프랜시스 갤러리Francis Gallery가 서울에서 첫 전시를 연다. 설립자이자 큐레이터인 로사 박Rosa Park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미국 여성 작가 애시 로버츠Ash Roberts와 나디아 야론Nadia Yaron의 2인전으로, 두 작가 역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다. 무대는 100년의 시간을 품은 북촌 한옥 ‘애가헌’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두 작가는 한옥의 건축과 장소성에 응답하는 새로운 작업을 제작했다. 로버츠는 한국의 전통 색채에서 일부 영감을 얻어 자연과 찰나의 감각을 포착한 회화를, 야론은 나무와 돌, 금속의 물성을 살린 조각을 집 안과 마당 곳곳에 펼친다. 사랑채와 안채,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처럼 한옥에 오랫동안 존재해온 경계 또한 전시를 읽는 중요한 실마리다. 보이는 달의 반대편이 사라진 것이 아니듯, 서로 다른 두 작가의 작업과 한옥이 만나는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나머지 절반’을 상상하게 한다. 전시는 무료이며,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니 참고하자.

3. 마시모데카를로, 《Awakened》


암호화폐와 바다, 그리고 모성. 좀처럼 한 화면에서 만날 것 같지 않은 세 가지가 배혜윰의 회화 안에서 조우한다. 밀라노 기반의 국제 현대미술 갤러리 마시모데카를로Massimodecarlo는 조병수 건축가가 설계한 한옥 공간이자 더일마 서울 플래그십에서 배혜윰의 개인전 《Awakened》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신작은 작가가 서울 지하철에서 우연히 엿들은 대화에서 출발했다. 투자와 암호화폐 이야기가 가족과 돌봄에 대한 고민과 자연스럽게 뒤섞여 오가는 풍경에서 동시대 한국 사회의 묘한 단면을 포착한 것이다. 배혜윰은 화면 위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암호화폐 차트의 선과 중력에 따라 흐르는 모유의 움직임을 연결하고, 바다와 조개 등의 이미지를 더해 시장과 몸, 가치와 생명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한 화면에 불러들인다. 선명한 색과 불규칙한 형태가 만들어내는 추상적 풍경 속에서 차갑게 수치화되는 시장의 움직임과 예측할 수 없는 몸의 감각이 팽팽하게 맞선다.

4. 선혜원 X 포도뮤지엄,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


SK그룹 창업주의 옛 사저를 미술 공간으로 개방한 삼청동 한옥 선혜원은 지난해 김수자*의 거울 설치로 낯선 풍경을 만들어낸 데 이어, 이번에는 ‘흔들리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품는다. 제주 서귀포 안덕면에 자리한 포도뮤지엄PODO Museum이 기획한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의 두 번째 전시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에는 모나 하툼Mona Hatoum, 최성임, 김윤수 세 여성 작가가 참여한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거창한 사건보다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개인과 그 곁의 평범한 사물들이다. 모나 하툼은 가느다란 선과 유리구슬이 공중에서 위태롭게 연결된 ‘Web’을 국내 최초로 공개하고, 최성임은 빵 봉지를 묶는 작은 끈을 이어 황금빛 덮개로, 김윤수는 유모차의 비닐을 수만 개의 얇은 발바닥 형태로 변환한다. 무심코 지나치던 사물이 한옥의 고요한 공간에 놓이는 순간, 흔들림과 연약함은 오히려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감각으로 다가온다. 전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며, 삼청 나이트에는 별도 예약 없이 관람할 수 있다.
*김수자 : 보따리와 바느질, 거울 등을 주요 매체로 사용해 공간과 정체성, 경계를 탐구하는 한국 현대미술가.

5. 아름지기, 《치마, 겹 위에 펼쳐진》


우리가 ‘한복 치마’라고 부르는 옷은 수천 년에 걸쳐 여러 모습으로 변화해왔다. 한국 전통문화를 동시대의 감각으로 이어온 아름지기가 올해는 ‘치마’ 한 폭에 주목한다. 《치마, 겹 위에 펼쳐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 치마의 형태와 그 안에 담긴 미의식을 살피는 동시에, 전통이 오늘의 패션으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시다. 온지음 옷공방*이 문헌과 유물 등을 토대로 재현한 시대별 한복과 함께 르쥬LEJE, 제이든 초JADEN CHO, 지용킴JiyongKim이 치마를 각자의 언어로 재해석한 작업을 선보인다. 과거의 복식을 유리장 안에 박제하기보다 오늘의 디자이너에게 다시 건네준다는 점이 이 전시의 묘미다. 한 폭의 천이 몸을 감싸는 방식부터 실루엣과 소재, 겹의 변화까지 따라가다 보면 ‘전통’이란 시대마다 새롭게 쓰이는 디자인 언어임을 발견하게 된다.
*온지음 옷공방 : 전통 복식의 형태와 제작 기법을 연구하고, 현대적인 소재와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의 복식 공방.

6. 운경고택, 《다시 도착한 집》


대청마루와 다락, 마당과 댓돌까지. 작가이자 공간 디자이너 김동희는 한옥의 구조를 전혀 다른 풍경으로 바꿔놓았다. 2년 만에 다시 전시 공간으로 문을 연 운경고택에서 그의 개인전 《다시 도착한 집》이 열린다. 1930년대에 지어진 고택 곳곳에는 신작 14점을 포함한 총 16점의 작품이 설치됐다. 앞마당의 땅을 부채꼴로 파내 낮은 눈높이에서 안채를 바라보게 하고, 사랑채의 다락은 실제 크기로 뒤집어 큰 마당에 옮겨놓았다. 안채의 댓돌에서 대청마루와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흰 계단을 직접 오르내리며 집의 높낮이와 구조를 몸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전시 기간에는 작가와의 대화와 커피 워크숍 등 연계 프로그램도 함께 마련되니, 네이버 예약 사이트를 참고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