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는 자전적 에세이 <지난날의 스케치>에서 “우리는 일상의 중요한 부분을 의식적으로 보내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리고 갑작스럽고 강렬한 충격으로 관통되었던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의 아름다울 만큼 고요했던 아침의 정적, 해협을 건너며 느낀 무한한 충족감, 느릅나무 이파리를 뚫어지듯 바라봤던 일, 밤에 엿들은 어른들의 무시무시한 이야기. 그녀는 이런 순간을 신비롭고도 오싹하지만 그럼에도 특별하다고 규정한다. 누구나 이따금 선명한 순간을 통과한다. 놀라운 건 그 감각이 선명할수록 기억에는 기이한 미사여구가 달라붙어 마침내는 내가 겪은 일이 아니었던 듯 아득해진다는 사실이다.
끝난 도시는 없다

파리에서 일 년을 지낸 적이 있다. 어느 봄날의 짧은 여행이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충동적인 결심을 몰고 왔다. 서른 살을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맞고 싶다는 사소하면서도 자의적인 바램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목적 없이 일 년을 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일상에서 탈락해 부유하는 시간 속엔 긴장과 환희, 자유로움과 헛된 쓸쓸함이 공존했다. 젊음의 끄트머리에서 보낸 파리의 시간은 그런 무한함 속에 나를 던져넣는 경험이었다. 루브시엔Louveciennes, 메종 발자크Maison de Balzac, 모스크 드 파리Grande Mosquée de Paris, 뮤제 피카소Musée Picasso. 강박에 가까울 만큼 날마다 파리의 고요한 곳들을 찾아다녔고, 공원과 거리를 배회하며 그 찬란한 잉여의 시간들을 느슨하게 채워갔다. 어느새 희뿜해진 십수 년 전 기억은 이따금 지루한 오후마다 작은 활력을 준다. 아무 명분 없이 지낸 그 중간자적인 파리 시절은 되새김질할수록 신기루처럼 멀어져가는 역설 속에 머문다. 그 이후로도 이따금 파리를 찾는 건 과거의 기억 위에 현재라는 실체를 포개어 한 도시와 더욱 가깝고 내밀하게 속삭이고 싶은 까닭이다.

언제나 초여름의 여행객이 되곤 하는 나는 다시 파리를 찾았다. 초록의 수벽, 오스만의 건물들, 초롱초롱한 와인과 강가의 밤 그리고 유난히 아름다운 사람들이 거니는 거리. 모두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계절을 만끽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구글맵을 보지 않고 한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이라 발길은 거리낌없이 무의식과 충동을 따른다. 누군가 파리에는 모종의 리듬이 존재한다고, 그것은 파리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된다던 말이 떠올랐다. 행여 여행자라면 어느 동네의 골목에 스며드는지, 혹은 어떤 호텔의 문을 밀고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리듬의 박자와 음색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마레에서는 조금 더 경쾌해지고, 생제르맹에서는 느슨해지며, 오페라에 이르면 화려한 장식음이 덧붙는다. 여행자는 결국 자신이 택한 주소만큼의 리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다.
디모레의 팔레트, 파리의 밤


그윽한 밤들을 위해 택한 곳은 오페라 가르니에 근처의 호텔 생 마르크Hotel Saint-Marc. 18세기 백작의 저택으로 지어져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는 신문사 ‘르 나시오날Le National’의 본사로, 20세기에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르 포카디Le Poccardi로 쓰였던 유서 깊은 건물이 부티크 호텔로 탄생했다. 무엇보다 놀라우리만치 관능적이고 화려한 인테리어를 선보이는 이탈리아 디자인 듀오 디모레 스튜디오Dimore Studio의 터치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이곳을 특별하게 한다. 브릿 모란Britt Moran과 에밀리아노 살치Emiliano Salci. 밀라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탐미적 색채와 질감을 과감하게 끌어올려, 이탈리안 테이스트를 제안해 온 그들이다. 미니멀한 편안함을 추구하는 최근 호텔들의 컨셉트와는 달리 극적인 미감과 농밀한 팔레트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진다.

작은 정원을 지나 호텔로 들어선다. 객실은 26개뿐이라 더욱 내밀하게 다가온다. 1930년대 파리를 물들였던 아르데코 스타일로 고색창연한 색감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느낌이다. 대리석 바닥과 다이아몬드 패턴 커튼으로 한껏 로비의 호화로움을 강조하고, 안쪽의 다이닝존은 그린 벨벳 체어와 핑크색 벽이 묘한 향수를 부른다. 직원은 오후 네 시부터 로비의 컴포트 존은 ‘어니스트 바’가 된다고 일러주었다. 바텐더가 없는 대신 마신 와인 이름과 방 번호를 작은 노트에 적어두면 된다고. 절제된 규모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환대를 구현하는 셈이다. 레스토랑이 없는 대신 주변 레스토랑과 연계해 룸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이다. 잔에 샴페인을 조금 따르고 창가 자리에 앉아 시각적 향연에 빠져든다. 디모레 스튜디오의 말이 떠올랐다.
옐로, 버건디, 핑크, 그린, 스카이블루, 퍼플처럼
평소 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컬러들을 조합해 변화무쌍함을 시도했어요.
여기서 발생하는 비밀스러운 느낌과 층층이 겹치는 시대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싶었죠.
탐미적인 방에서의 불면



커튼을 반쯤 드려둔 4층 끝의 객실은 마치 작은 연극무대처럼 스스로를 밝힌다. 막이 오르기 직전의 정적을 머금은 채 투숙객을 기다린 듯하다. 전신 거울에 새겨진 마름모꼴의 패턴 장식이 압도된 나를 비춘다. 버건디 벨벳 의자와 금빛 램프, 끝이 뾰족한 스카이 블루 헤드보드가 만들어내는 장면은 충분히 관능적이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오스만 건물의 연한 베이지와 만나면서 묘하게 균형을 이뤘다. 화려함이 도시의 무채색과 부딪히며 스스로 농도를 조절하듯 말이다. 밀라노에서는 색이 공간을 장악한다면 파리에서는 색이 도시와 대화한다. 생 마르크의 밤은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깊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던 건 지금을 둘러싸고 있는 이 드물고 특별한 아름다움과 함께 기꺼이 밤을 새우고픈 마음이었을 것이다. 탐미의 시대를 현대적으로 번안한 이 공간은 감각을 흔들어 깨우기 충분하다.

지하 스파는 또 다른 세계다. 푸른 타일의 탕 안에 출렁이는 물이 전부인 이곳은, 예약을 하면 한 시간 동안 혼자 사용할 수 있다. 향과 뜨거운 수증기로 자욱해진 탕 안에서는 일순간 모든 장식과 컬러가 사라져 버린 듯했다. 강렬한 시간은 언제나 짧다고 했던가. 파리는 늘 예기치 않은 흐름과 풍경으로 목석같은 여행자도 도취되게 만들고는 한다. 넘쳐나는 파리의 이미지는 도리어 이 도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지 모른다. 파리의 어느 골목에선가 아무런 언어도 무용해지는 순간을 마주치기 위해서는 더욱 섬세하게 걷고 보며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반짝이는 것들은 늘 우리와 파리 사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