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ial

패션에 뿌리 내린 여성성의 설계자,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커리어는 패션이라는 매체를 통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재정의해 온 투쟁과 연대의 기록이다. 멈춤 없는 전진과 전통의 현대적 해석으로 점철된 그녀의 행보는 하나의 확신으로 수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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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 뿌리 내린 여성성의 설계자,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커리어는 패션이라는 매체를 통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재정의해 온 투쟁과 연대의 기록이다. 멈춤 없는 전진과 전통의 현대적 해석으로 점철된 그녀의 행보는 하나의 확신으로 수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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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 뿌리 내린 여성성의 설계자,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커리어는 패션이라는 매체를 통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재정의해 온 투쟁과 연대의 기록이다. 멈춤 없는 전진과 전통의 현대적 해석으로 점철된 그녀의 행보는 하나의 확신으로 수렴한다.



ⒸMaria Grazia Chiuri

패션계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환상을 제조하는 디자이너가 있고, 그 환상 속에 동시대의 메시지와 사회적 담론을 설계하는 전략가가 있다. 가장 거대한 패션 하우스 중 하나인 디올Dior 역사상 최초의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는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그녀가 설계한 실루엣은 단순히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이 제안했던 ‘뉴 룩New Look’의 재현이 아니라, 현대 여성이 사회와 마주하는 자존감이자 목소리였다. 그녀의 디자인은 단순히 런웨이 위의 환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쇼 피날레에 항상 작업용 바지나 단순한 셔츠를 입고 등장하며, 패션이 특별한 날을 위한 변장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지탱하는 유니폼임을 몸소 보여준다. 이는 피비 파일로Phoebe Philo가 보여주었던 ‘뉴 미니멀리즘New Minimalism’과는 또 다른 결의 ‘리얼리티 럭셔리Reality Luxury’다. 지난 30여 년간 그녀가 펜디FENDI와 발렌티노Valentino를 거쳐 디올의 정점에 서기까지의 길을 통해, 왜 우리가 그녀의 세계관에 응답하는지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로마의 토양과 펜디: 액세서리 미학의 탄생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1992년 펜디에 재직하던 시절 ⒸMaria Grazia Chiuri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미학적 근간은 로마의 유서 깊은 예술성과 장인 정신에 맞닿아 있다. 1964년 로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의상실에서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녀의 본격적인 패션 여정은 1989년 펜디에 입사하며 시작된다. 당시 펜디는 모피와 가죽 공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지만, 젊은 층을 공략할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치우리는 액세서리 부서에서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Silvia Venturini Fendi와 함께 일하며 하우스의 DNA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임무를 맡았다.

펜디의 아이코닉 백, 바게트 ⒸFENDI

이 시기 그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펜디 하우스의 가장 아이코닉한 백으로 손꼽히는 ‘바게트 백Baguette Bag’의 탄생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이다. 1997년 출시된 바게트 백은 당시의 미니멀리즘 트렌드에 반기를 든, 작고 화려하며 개성 넘치는 아이템이었다. 이는 단순히 유행하는 소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가방 하나가 브랜드 전체의 정체성을 어떻게 견인하고 여성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목격한 결정적인 경험이었다. 그녀에게 액세서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태도’의 일부가 되었다. 펜디에서의 10년은 그녀에게 ‘실용적인 럭셔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여성들이 실제로 무엇을 소망하는지를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수업이었다.

발렌티노 시대: 듀오가 만든 낭만적 혁명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듀오로 발렌티노를 이끌었던 시절 ⒸValentino

1999년, 그녀는 영혼의 파트너인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Pierpaolo Piccioli와 함께 발렌티노로 자리를 옮긴다. 창립자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의 은퇴 이후 위기에 처했던 하우스를 물려받은 이 듀오는, 고전적인 오트 쿠튀르의 문법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변주했다.

그녀가 발렌티노에서 보여준 것은 ‘금욕적인 낭만주의’였다. 목까지 올라오는 레이스 드레스, 정교한 자수, 그리고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성스러운 실루엣은 당시 자극적인 섹시함을 강조하던 트렌드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특히 2010년 선보인 ‘락스터드Rockstud’는 상업적으로도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컬렉션이다. 스터드 장식을 전면에 내세워 우아함 속에 숨겨진 여성의 강인함과 반항적인 기질을 포착해 낸 디자인으로 지금까지도 발렌티노의 클래식 라인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처럼 치우리는 이때 이미 ‘여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럭셔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디올 시대: 유리 천장을 깨고 페미니즘을 입다

2016년,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디올의 70년 역사상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며 패션계의 판도를 바꾼다. 그녀가 복귀하며 내건 화두는 명확했다. 남성 디자이너들이 정의해 온 ‘꽃 같은 여성’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것이었다. 데뷔 쇼에서 선보인 “We Should All Be Feminists” 티셔츠는 패션쇼장을 넘어 전 세계적인 사회적 운동으로 번졌다. 나이지리아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의 에세이 제목을 빌린 이 한 장의 티셔츠는, 럭셔리 패션이 어떻게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내고 동시대 여성들의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는 대신, 편안한 니트웨어와 튤 스커트를 제안하며 ‘움직임의 자유’를 여성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가방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치우리가 선보인 캔버스 소재에 정교한 자수를 더한 ‘북 토트Book Tote’는 ‘일하는 여성’들이 노트북과 책을 담아 다닐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도구가 되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디자인해 시그니처가 된 ‘북 토트’ 백 ©Dior

한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매 시즌 전 세계의 여성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패션쇼를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연대의 장으로 승격시켰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의 거대한 설치 미술 속에서 모델들을 걷게 하거나, 니키 드 생 팔Niki de Saint Phalle의 ‘나나’를 테마로 삼는 등 그녀의 쇼는 언제나 여성의 시선을 배경으로 했다.

친정으로의 귀환: 펜디 2026 F/W, 다시 쓴 로마의 서사시

2026년, 패션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지각변동을 목격했다. 디올에서의 10년 대장정을 마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자신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던 친정, 펜디의 수장으로 전격 복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펜디 데뷔작인 2026 F/W 컬렉션은 펜디 가문의 여성들이 지켜온 강인한 모계 사회의 유산에 디올 시대부터 다져온 여성성에 관한 통찰을 이식했다는 찬사를 얻었다. 시작은 바닥에 프린트한 “나보다 우리Less I, More Us”라는 구절로, 연대하는 삶을 지지하는 그녀의 가치관을 짐작케 했다. 이탈리아 구체시를 대표하는 시인 미렐라 벤티볼리오Mirella Bentivoglio의 아카이브와 협업해 제작한 주얼리와 그래픽 티셔츠는, 디올 시절부터 이어온 여성 예술가들과의 인연을 펜디에서도 변함없이 이어가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한편 그녀가 1990년대에 디자인에 참여했던 ‘바게트 백’에 크로스보디 스트랩을 더해 두 손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재해석했고, 펜디의 근간인 모피와 가죽 공예 기술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업사이클링한 코트, 그리고 입는 사람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유연한 테일러링을 통해 ‘삶을 위한 옷’을 제안했다.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파올라, 안나, 실비아, 가족들,
그리고 여기서 오랫동안 일해왔고 제가 어릴 때부터 기억하는 이들 모두요.

합류 시점의 이 짧은 소회는 이번 컬렉션 전체를 관통하는 ‘유대’라는 테마가 단순한 수사가 아닌, 그녀의 삶과 기억에 뿌리 내린 진정성 있는 감각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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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 뿌리 내린 여성성의 설계자,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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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정서를 설계하는 조용한 혁명가, 피비 파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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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스트리트웨어 시대의 럭셔리 문법을 바꾼, 뎀나 바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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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디자이너, 조나단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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