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공간은 중구 을지로3가의 아사시. 미로처럼 얽힌 계단을 따라 올라 4층에 닿으면, 바깥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펼쳐진다. 낡고 무질서한 거리 위에 놓인, 정제된 하나의 장면. 물을 올리고 찻잎이 천천히 풀어지는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이유 없이 마음이 느슨해진다. 이곳의 시간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흐른다. 차를 준비하는 손의 리듬, 잔이 내려앉는 소리, 그 사이를 채우는 정적. 과하지 않게 맞물린 요소들이 감각을 서서히 환기한다.
긴 시간 기획자이자 버벌리스트로 활동해 온 배재희는 타인의 브랜드를 설계하던 시간을 지나, 자신의 이름으로 공간을 완성했다. 아사시ASASI는 그녀가 오래 품어온 기호, ‘차Tea’에서 출발한다. 기준은 명확하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 ‘낯설지만 기분 좋은 것’. 효율이나 기능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머문 뒤에는 분명히 남는 감각. 아사시는 그 기준을 공간의 밀도와 리듬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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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Pick 1. 무용하지만 아름답고, 낯설지만 기분 좋은 공간

몇 해 전, 건강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던 시기 일본의 건강차와 다양한 블렌드 티에 매료되면서 아사시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걸 좋아할까’를 먼저 계산하기보다,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빠르게 구현하고 그 반응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방식. 그 과정은 유연하지만 기준은 흔들리지 않는다. 직관을 신뢰하고 속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그녀의 작업 전반을 관통한다.
배재희의 작업은 경험을 축적하며 형태를 빚어낸 뒤, 완결된 콘셉트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 정렬해 나가는 방식에 가깝다. 취향은 설명되기보다 쌓이며 드러나는 것이기에, 이곳은 설명보다 감각이 먼저 남는다. 오랜 시간 다뤄온 취향이 비로소 자신의 이름 아래 응축된 결과다. ‘아사시’는 인도네시아어로 ‘근원(Origin)’을 의미한다.


이 공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블렌드’. 낮에는 차를, 밤에는 칵테일을 블렌딩한다. 하나의 맛을 선명하게 드러내기보다, 요소가 섞이며 만들어내는 변화에 끌렸기 때문이다. 보리와 옥수수, 결명자를 함께 끓이던 유년의 기억 역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차를 중심에 두고 우유나 술을 더해 새로운 음료를 만들고,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대비까지 하나의 결로 묶는다.
아사시가 고객과 만나는 방식은 결국 식음료다. 그렇기에 예측 가능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낯설지만 기분 좋은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미 포화된 차 시장에서 경쟁하기보다, 새로운 결을 제안하는 쪽을 택했다.
Editor’s Pick 2. 동서양 재료의 조화로운 만남



배재희는 오랜 시간 브랜드의 언어를 다듬어온 인물답게, 아사시의 메뉴에서도 그 결이 먼저 읽힌다. 직접적이면서도 은밀한 지점에서 균형을 잡는 방식이다. 참기름, 대추, 서리태, 도토리. 익숙한 재료들이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인다. 참기름 호지차 크림 라떼, 대추 서리태 짜이, 도토리 판나코타처럼. 이 재료들은 전면에서 맛을 지배하기보다, 향과 질감으로 개입하며 전체의 결을 미묘하게 흔든다. 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기억에 남는 방식이다.





아사시의 메뉴는 특정한 정체성을 강조하기보다, 재료의 가능성과 조합에서 출발한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하나가 앞서기보다 전체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래서 이곳의 메뉴는 맛보다 장면으로 기억된다. 이것이 아사시가 구사하는 브랜드 언어다.

참기름이 더해진 호지차 크림 라떼는 고소한 향을 남기지만, 결코 주도하지 않는다. 대추와 서리태가 들어간 차 역시 익숙함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예상과는 다른 터치를 남긴다. 익숙하지만 낯선 감각. 아사시는 그 미묘한 지점을 집요하게 조율한다.
Editor’s Pick 3. 절제된 밀도로 완성한 공간의 미학

공간 디자인을 맡은 아세티크 팀과 가장 먼저 논의한 것은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공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마감재와 집기, 음악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느껴질지를 하나씩 결정해 나갔다. 특히 사운드는 경험의 밀도를 좌우한다. 마란츠의 빈티지 앰프와 탄노이 스피커로 사운드를 구축했다. 요소를 덜어내는 대신, 각 디테일의 완성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중앙의 테이블과 기둥, 기물과 선반은 모두 손을 거쳐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우드와 대리석의 대비는 공간에 은은한 긴장감을 더한다. 여기에 DJ가 큐레이션한 플레이리스트가 더해지며 감각의 층위가 깊어진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손에 닿는 것까지. 절제된 구성 안에서 완성도를 밀어붙인 결과다.

아이덴티티 디자인 by 고혁준


배재희 디렉터와 고혁준 디자이너는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파트너다. 언젠가 꿈에서 스친 단어 ‘아사시’를 현실의 형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 역시, 두 사람의 긴밀한 대화 속에서 완성됐다. 브랜드를 준비하던 시기,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 자체에 주목하던 태도는 하나의 이미지로 이어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에 새겨진 마방진처럼, 숫자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함축하는 구조. 여기에 아르데코 가구에서 발견한 ‘흑단의 사각형’이라는 조형 언어가 더해졌다. 아홉 개의 검은 사각형 아사시 로고는 그렇게 완성됐다.
공간 디자인 by 아세티크

아사시의 공간 디자인은 아세티크가 맡았다. 배재희 디렉터는 오래전부터 하정호 대표가 구축해온 여러 공간을 통해, 손님으로서 이들의 감각을 지켜봐왔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오브제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공간의 결. 그 축적된 태도에 대한 신뢰가 자연스럽게 협업으로 이어졌다. 공간을 준비하던 시기, 배재희 디렉터는 1920년대 아르데코 양식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고, 하정호 대표 역시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었다. 두 감각이 맞닿으며 방향은 빠르게 정리됐다. 아르누보의 유려한 곡선과 대비되는 직선의 긴장, 기하학적 비례와 균형이 만들어내는 단단한 아름다움. 그 구조적 미학이 아사시의 공간에 밀도 있게 스며들었다.
가구 by 조용무 작업소


이 공간을 지배하는 소재는 원목이다. 선별과 가공, 그 모든 과정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파트너로 조용무 작업소가 선택됐다. 가구는 단순한 구성 요소를 넘어, 아세티크가 설계한 공간의 미학을 물성으로 완성하는 역할을 맡는다. 몸이 닿는 의자부터, 공간의 중심을 형성하는 기둥과 벽면 수납장까지. 모든 구조가 하나의 결로 이어지며, 조용무 작업소의 손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세라믹 by 작가 김민선


아사시의 집기와 조명은 도예가 김민선의 작업으로 완성됐다. 돌과 도자기라는 재료는 자칫 차갑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공간의 온도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빛을 머금은 표면과 손끝에 닿는 질감. 단단한 물성은 공간 안에서 천천히 온기를 띠며, 아사시의 정제된 분위기를 은은하게 물들인다.
유니폼 by pan


아사시의 유니폼은 단순한 작업복이 아니라, 공간에 머무는 태도를 완성하는 장치다. 차를 내리는 시간과 그 주변의 공기를 하나의 결로 묶기 위한 설계에 가깝다. 일본 디자이너 pan과 협업해 1960~70년대 유럽의 약사와 의사 유니폼을 아카이브하며 형태를 정리했다. 클래식한 실루엣 위에 절제된 라인과 소박한 디테일을 더해, 단정함과 미묘한 긴장감을 동시에 남긴다. 이 감각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 포착한 정서와 맞닿아 있다. 페미닌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균형. 아사시가 지향하는 정제된 유머는 이 유니폼을 통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다.
Interview with 배재희 디렉터

— 개인의 취향을 넘어, 아사시라는 공간이자 티 브랜드를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브랜드는 결국 오너가 오래 좋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전달되고, 권할 수 있으니까요. 차에 대해 특별히 깊은 조예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지극히 사적인 취향을 외부로 꺼내기로 결심한 순간이 있었어요. 아사시를 준비하면서 기초부터 차근히 공부했고, 더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 여러 선생님을 찾아다녔죠. 메뉴를 개발할 때는 좋아하던 영화나 소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지냈던 시간의 기억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 을지로3가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동네는 처음부터 을지로로 정해두고 있었어요. 차를 다루는 공간들이 주로 자리 잡는 고요한 동네보다는, 아사시가 지향하는 결을 온전히 보여주기 어렵다고 생각했거든요. 오히려 번잡하고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환경이 ‘블렌드’라는 개념과 더 잘 맞는다고 느꼈어요.
을지로는 흥미로운 곳이에요.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 꼭 1층에 있지 않죠. 2층, 3층, 그리고 아사시처럼 4층에도 예상 밖의 장면들이 숨어 있어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 <알레프>처럼, 무질서한 풍경 속에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이 숨어 있는 느낌. 을지로라는 맥락 안에서 아사시가 하나의 반전처럼 작동하길 바랐어요.
— 하나의 테이블을 공유하는 구조도 인상적입니다.
기억에 남는 리뷰가 하나 있어요. 처음에는 옆 사람과 가까워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공간의 주연이 되었다가 또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는 이야기였죠. 제가 의도했던 경험을 정확히 짚어준 것 같아 감사했어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적절히 소외되고, 또 적절히 연결되는’ 상태를 경험하길 바랐어요.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존재를 배경 삼아 각자의 시간에 몰입할 수 있는 거리감. 그 균형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아사시에서 의도한 경험은 무엇인가요?
단순히 차를 마시는 행위를 넘어, 공간이 만들어내는 리듬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는 경험을 생각했어요. 을지로의 풍경을 지나 4층까지 올라온 뒤, 예상하지 못한 공간을 마주하는 순간 자체가 하나의 흐름이 되길 바랐고요. 많은 분들이 음악과 차를 곁들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이곳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저 역시 큰 위로를 받아요.
— 가장 좋아하는 시간과 추천 메뉴가 있다면요?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 옆 건물에서 반사된 빛이 실내로 들어오는 순간이 있어요. 천장과 벽면이 모두 하얀색이라 빛이 부드럽게 퍼지는데, 그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이때는 오쿠미도리 말차 라떼나 따뜻한 카카오 스파이스 짜이를 권하고 싶어요.
— 아사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요?
‘무용함’이요. 브랜드를 만들다 보면 ‘심플함’이나 ‘유용함’처럼 보편적인 가치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만으로는 고유한 결을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아사시는 ‘쓸모없지만 가지고 싶게 만드는 것’에 대한 제 나름의 답에 가까워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모두 필연적이지만은 않잖아요. 때로는 불필요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고요. 여백이 있어야 글자가 읽히듯이, 아사시가 그런 여백 같은 공간으로 남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