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포토그래퍼 정멜멜의 제네, 〈멀리서 간 사람의 회복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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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정멜멜의 제네, 〈멀리서 간 사람의 회복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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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정멜멜의 제네, 〈멀리서 간 사람의 회복록〉 

* 정멜멜 포토그래퍼가 직접 선곡한 음악과 함께 에세이를 즐겨보세요.

멀리 떠난 뒤에야 비로소 집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익숙한 것을 뒤로하고 9,000km를 건너 도착한 낯선 집에서, 오히려 오래 잊고 있던 안온함을 발견하는 것처럼. 공간을 기록하는 포토그래퍼 정멜멜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해안 마을 제네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다. 예기치 않은 아픔으로 여행의 리듬이 멈춰버린 순간, 별다른 것 없는 집과 너른 마당, 그 너머로 이어지는 바다의 빛과 바람은 그를 천천히 일상으로 돌려보냈다. 이번 에세이는 여행보다 머무름이, 특별한 경험보다 평범한 집 한 채가 더 깊은 기억으로 남게 된 어느 회복의 시간을 기록한다.

〈멀리서 간 사람의 회복록〉

ⒸMELMEL

공간을 기록하는 직업 때문인지, 에어비앤비에서 낯선 도시의 집들을 둘러보는 취미가 생겼다. 호텔처럼 앞선 투숙객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는 공간보다, 유려하지 않아도 생활감과 취향이 약간은 드러나는 공간이 좋았다. 침구와 쿠션, 컵의 형태나 액자의 양식, 카펫과 소파의 색감이 의도하지 않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살펴보는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더하자면 연박하기에 부담 없는 가격대의 집들이길 바랐으니 즐겨찾기에 쌓이는 숙소들은 자연스레 비싼 도심이나 유명 관광지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KIOSK

그 무렵, 마음이 맞아 종종 여행을 다니던 친구들과 오랜만에 일정을 맞췄다. 스페인의 란사로테Lanzarote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에어비앤비 앱을 켜고 머물 집들을 찾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출발한 검색은 어느새 서북쪽의 노르망디Normandy까지 흘러가 있었다. 어차피 근교 도시들도 둘러보고 싶었고, 꽤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해온 터라 서울을 길게 떠나 있을 만한 명분과 여유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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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예약한 곳은 제네Genêts라는 생소한 이름의 소도시에 위치한 숙소였다. 그레브 해안 끝의 단독 빌라. 주택 전체를 빌리는 것 치고는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긴 했지만 노르망디를 대표하는 섬이자 프랑스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몽생미셸Le Mont Saint-Michel도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예약 페이지 속 사진들은 수평과 수직이 맞지 않고 화질도 낮았지만, 그 엉성함 속에서 이상하게 안락함이 느껴졌다. 박공지붕을 얹은 낮은 단층 주택은 세월에 그을린 목재 마감 특유의 수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내부 가구의 구성도 단출했다. 바닥에는 페르시아풍 카펫이 깔려 있었고, 짙은 원목 로우 테이블과 잔꽃무늬 패브릭 소파, 빛바랜 포스터가 놓여 있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요소는 없었지만, 그 무난함에서 오는 소박하고 친근한 정서에 반해 ‘예약’ 버튼을 누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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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방마다 난 넓은 창 너머로 들어오는 풍경이었다. 사방의 격자창과 커다란 유리문 너머로 해안가 마을의 풍경이 그대로 전해졌다. 직업 덕에 사진만 봐도 실제 공간이 사진보다 좋을지, 그렇지 않을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이곳은 단연 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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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숙소 하나만 보고 제네를 일정에 넣자, 그 앞뒤의 경로도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여생을 보내며 작업했던 집과 정원이 남아 있는 마을 ‘지베르니Giverny’, 그 곁의 ‘베르농Vernon’에 들르는 계획을 완성했다. 마침 숙소가 널찍한 구조에 침대도 여러 개이기에 원래라면 란사로테에서 모였다가 각자의 길로 흩어지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노르망디로 함께 가자고 제안할 수 있었고 그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즉흥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제네의 숙소를 예약하며 여행 계획의 절반, 아니 80퍼센트 이상은 세운 것과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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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벽한 여행이 완성되었다 생각한 순간, 서글픈 변수가 생겼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여행 일정이 이미 중반을 넘어 제네로 향할 날이 가까워졌을 무렵, 그 직전 도시인 란사로테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내게는 첫 코로나였다. 증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지만, 나는 하필 호되게 앓는 쪽이었다. 곧바로 격리에 들어가 밤과 낮의 경계가 흐릿한 며칠을 보냈다. 식은땀을 쏟으며 비몽사몽을 헤매느라 친구들이 문 앞에 두고 간 음식과 음료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휴가의 남은 일정은 어느새 공포로 다가왔다. 제대로 걷기도 힘든 몸으로 란사로테를 떠나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국경을 건너가야 하는 긴 이동이 남아 있었다.

ⒸKIO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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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를 마치고 이동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몸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에 나는 왜 이토록 긴 여행을 계획했을까. 그것도 교통이 불편한 작은 마을에 숙소를 잡았을까. 스스로를 원망하며 제네에 도착했다. 도착한 제네의 숙소는 예약 페이지의 사진으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무엇보다 마당이 어마어마하게 컸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대하다 싶을 만큼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노르망디 해안가 마을의 끝자락에 자리한 숙소에서는 몽생미셸만 전체가 마당의 연장처럼 보였다. 시선이 닿는 해안선까지 모두 이 집을 위해 마련된 거대한 앞마당 처럼.

ⒸKIO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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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분위기 역시 숙소를 닮아 온화하고 고요했다. 군데군데 자리한 레스토랑 몇 곳은 휴가 중이었다. 아이스크림이나 빵, 간단한 식료품을 살 수 있는 정도의 한적함이었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우리는 작은 부엌에서 한국에서 자주 해 먹던 음식들을 요리했고, 여행의 피로를 풀고 싶었던 친구들도 저마다 마당에 널브러져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동네를 걷다보면 들판을 마음껏 달리는 개나 풀을 뜯는 양떼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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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동네에 대해 찾아보았다. 중세 시대부터 몽생미셸을 찾는 순례자들이 바다와 갯벌을 걸어서 건너기 위해 모여들던 역사적인 출발지였다. ‘순례자’를 뜻하는 말의 어원이 된 라틴어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본래 ‘이방인’ 또는 ‘멀리서 온 사람’을 가리켰다. 들판과 경계를 지나 낯선 땅에 이른 사람이라는 의미다. 나야 딱히 성지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삶의 근원적인 진리를 깨닫고자 했던 순례자들이 이 조용한 마을에서 마음을 가다듬었을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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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마당의 선베드에 누워 태양이 주는 따스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았고, 밤에는 해열제를 삼킨 채 낯설지만 아늑한 침대에서 잠들었다. 그렇게 서서히 회복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멀리까지 와서도 ‘집의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이곳을 예약했고, 그것은 최근 몇 년간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익숙한 집을 떠나 또 다른 집으로 왔구나. 비행기를 타고, 차를 빌려, 도로를 달리고 또 달려서. 여행을 포기해야 하나 싶을 만큼 몸은 좋지 않았지만, 내 집도 아닌 이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기운을 얻으며 나는 천천히 회복해갔다. 체크아웃할 무렵에는 일상적인 컨디션을 되찾았고, 이후 몽생미셸과 지베르니까지 예정했던 여정을 무사히 이어갈 수 있었다.

ⒸKIO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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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함과 완벽한 휴식이 보장됩니다.” 귀한 빈티지 가구나 고급 마감재 하나 없는 이 숙소의 진부한 소개 문장은 진짜였다. 이 단순한 사실을 알고 싶어 9,000km를 떠나왔구나. 다시 일상의 도시로 돌아온 지금도, 종종 쉬어가고 싶거나 불필요한 것들을 욕망하게 될 때 제네의 충만한 태양과 끝없이 펼쳐지던 해안을 생각한다. 멀리서 온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내어주던 치유의 빛과 회복의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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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정멜멜의 제네, 〈멀리서 간 사람의 회복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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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디렉터 김성은의 코펜하겐, 〈봄을 알리는 포스케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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