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기온은 40도 가까이 치솟아 있었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뜨거운 공기였지만, 처음 마주한 베네치아의 풍경은 뜨거운 열기마저 잠시 잊게 했다. 수상버스 바포레토Vaporetto에 몸을 싣자, 도시의 일상이 천천히 시야를 채운다. 부채를 느릿하게 흔들며 바닥을 응시하는 젊은 여인, 문가에 기대 묵묵히 물길을 바라보는 양복 차림의 노인. 들뜬 여행자의 눈에는 그들 모두가 베네치아 그 자체처럼 보인다. 관광객의 설렘과는 다른 결의 시간 속에서, 저마다의 하루와 삶을 묵묵히 건너는 사람들. 물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도시에는 여행자의 낭만과 주민의 일상이 아무렇지 않게 겹쳐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베네치아를 사랑한 방식

아카데미아 선착장에 내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Peggy Guggenheim Collection’으로 향한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몇 번이나 꺾어 돌아야, 비로소 운하를 마주한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Palazzo Venier dei Leoni’에 닿는다. 전쟁과 예술, 그리고 수많은 예술가들과의 격랑 속에서도 누구보다 대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던 여인. 평생 세계를 떠돌던 그녀는 마지막 30년을 이곳에서 보냈고, 사랑했던 반려견 14마리와 지금도 정원에 잠들어 있다. 전시장을 유유히 걸으며 마그리트, 미로, 피카소, 달리의 그림을 응시한다.

평생에 걸쳐 모은 그녀의 컬렉션은 뜨거운 열정과 갈등, 연민을 함께했던 예술가와의 우정 혹은 사랑의 증표나 다름없다. 어느 날 밤의 파티에서 그녀는 한쪽 귀에 초현실주의 화가 이브 탕기Yves Tanguy가 만들어준 귀걸이를, 다른 쪽 귀에는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가 만든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녀의 방을 개조한 전시장에 바로 그 귀걸이가 나란히 걸려 있다. 귀걸이를 마치 자신의 미적 선언처럼 걸쳤던 페기. 예술도, 사랑도, 삶마저도 오롯이 향유한 그녀의 대담함이 배어 있다.
귓가에는 운하의 물결이 건물 벽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번진다. 테라스로 나서면 햇빛을 머금은 라군과 그 위를 미끄러지는 곤돌라, 시간이 멈춘 듯한 베네치아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끝없이 넘실대는 물살 앞에 서 있으면 ‘살아 있다’라는 감각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진다. ‘매일 라군 위를 떠다니며 석양을 바라보고 싶어진다’라는 페기의 말을 떠올리는 순간, 바로 이 테라스에서 이 빛과 바람을 마주하며 무심코 흘려보낸 혼잣말처럼 들린다.

고전 위에 내려앉은 색의 리듬


페기의 테라스에서 라군을 바라본 뒤, 운하를 따라 10여 분 천천히 걷는다. 여름 햇살에 데워진 이스트리아 석재와 물 비린내가 뒤섞인 골목 끝, ‘일 팔라초 익스페리멘탈Il Palazzo Experimental’에 도착했다. 건물 파사드에는 호텔 이름 대신 ‘아드리아티카Adriatica’라는 황금빛 글씨가 반짝인다. 이곳이 16세기 아드리아티카 해운회사의 팔라초Palazzo*였다는 시간을 휘황찬란하게 드러낸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풍경은 반전된다. 고색창연한 베네치아는 온데간데없고, 팝한 색감과 대담한 패턴이 공간을 경쾌하게 채운다. 버건디와 코럴, 세이지 그린이 리듬을 만들고, 줄무늬 패브릭과 곡선형 가구는 클래식한 아치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팔라초: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시기에 세워진 귀족들의 개인 저택.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부유한 시민의 대저택까지 포괄하는 용어로 확장되었다. 대칭적인 형태에 처마 장식과 지하실을 보유하고, 창문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외관을 지닌 건축물들을 한데 모아 팔라초로 지칭한다.



뾰족한 무어풍 창으로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고, 세월을 머금은 대리석 바닥 위에는 짙은 버건디와 세이지 그린, 크림색 가구가 리듬감 있게 놓여 있다. 처음 만나는 팝 하면서도 현란한 베네치아의 면모. 어떤 면에선 멤피스 그룹Memphis Group*의 반항적인 기운도 엿보였다. 오래된 것을 허무는 전복이 아니라, 오래된 것 위에 새로운 감각을 아무렇지 않게 얹어버리는 태도. 이런 전복과 시도를 좋아한다. 만토바Mantova에서 이곳까지 하루짜리 여행을 감행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하룻밤을 위해 기차를 타고 도시를 옮기는 일, 여행은 가끔 효율보다 호기심을 따라야 한다.
*멤피스 그룹: 1981년 이탈리아 디자이너 에토레 소사스에 의해 결성된 포스트모던 디자인 그룹. 기존의 획일적인 디자인에 반발하기 위해 선명한 색채와 비정형적인 형태로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초록이 무성한 정원으로 이끌리듯 나가보았다. 한 무리의 멋쟁이들이 모두 위대한 개츠비 속 인물들처럼 새하얀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 입고 우아한 이탈리아의 식전주, 아페리티보Aperitivo를 즐기고 있었다. 인생이 솜털처럼 가볍다는 듯 낙천적인 웃음과 표정을 짓고서 다시 없을 한여름 오후를 만끽 중이다. 부겐빌레아, 사이프러스, 레몬 나무가 초록 그늘을 드리우고 곳곳에 아프로디테 조각상과 초록 철제 의자가 덩그러니 주인을 기다린다. 우아한 손짓을 건네는 정원 뒤로 붉은 팔라초가 지중해의 빛과 함께 타오른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은 여전히 관광객들의 발걸음으로 들썩이지만, 이 안에는 더 깊은 계절, 무위의 시간이 흐른다. 아무 일정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늘에 앉아 레몬 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잠시 도시의 소음을 등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오후, 그 느긋한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아치와 색채가 머무는 꼭대기 방


내가 선호하는 꼭대기 층의 방. 육중한 대들보들이 가로지르는 천장에는 손바닥만 한 창이 뚫렸다. 옷장과 창틀, 침대 헤드 보드와 소파까지. 시선을 옮길 때마다 아치가 또 다른 아치를 불러내며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장난스러운 리듬으로 엮는다. 버건디와 세이지 그린, 줄무늬 패브릭은 자칫 과할 법도 한데, 오래된 목재와 테라초 바닥 위에서는 오히려 묘하게 안정감을 얻는다. 객실을 한참 둘러보다 문득 이 호텔의 설계를 맡은 프랑스 디자이너 도로테 메일리슈종Dorothée Meilichzon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16세기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부터 20세기의 카를로 스카르파까지,
베네치아에 흔적을 남긴 건축가들을 떠올렸어요.
그들의 건축에는 아름다운 아치가 반복해서 등장하죠.
여기에 고대 문화와 베네치아 석호의 찬란한 색채,
멤피스 디자인의 대담함을 더했습니다.
- 도로테 메일리슈종(Dorothée Meilichzon)

창밖으로는 베네치아의 작은 집들과 웅장한 성당이 끝나가는 여름의 태양 아래 잠잠히 숨을 고르고 있다. 정원에서는 잔 부딪히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짜랑짜랑 울려 퍼진다. 저 소란은 밤까지 이어질 것만 같다. 문득 이곳에서 보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기대감으로 가득 차오른다. 슬슬 1층 칵테일 바로 내려가 지중해 향을 담은 탈라사Thalassa 한 잔을 주문해야겠다. 프랑스 밴드 렝페라트리스L'impératrice의 ‘Peur des filles’가 낮게 흐르고, 창밖에서는 오래된 종탑의 종소리가 정각을 알린다. 수백 년 동안 울려온 종소리와 프렌치 디스코가 아무렇지 않게 포개지는 베네치아는 원래 이렇게 쿨했던 걸까. 진득한 역사 위에 ‘힙’한 멋이 절묘하게 스며드는 곳. 아마 나는 이런 멋을 만나야 비로소 직성이 풀리는, 꽤 까다로운 여행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