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ial

어떤 디자인은 스스로 태어난다, 버내큘러 디자인

도시를 상징하는 것이 거대한 상징물뿐만은 아니다. 도시가 오랜 시간 스스로 선택하고 채워 넣은 일상의 사물들도 그곳의 얼굴이 된다. 수많은 사람이 반복해 사용해 온 물건들은 사람들의 삶을 채우며 어느 순간 한 도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남는다. 한 명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름 없는 이들의 생활과 시간이 완성한 디자인, 여러 도시의 ‘버내큘러(Vernacular)’를 살펴보았다.

Editorial

어떤 디자인은 스스로 태어난다, 버내큘러 디자인

도시를 상징하는 것이 거대한 상징물뿐만은 아니다. 도시가 오랜 시간 스스로 선택하고 채워 넣은 일상의 사물들도 그곳의 얼굴이 된다. 수많은 사람이 반복해 사용해 온 물건들은 사람들의 삶을 채우며 어느 순간 한 도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남는다. 한 명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름 없는 이들의 생활과 시간이 완성한 디자인, 여러 도시의 ‘버내큘러(Vernacular)’를 살펴보았다.

Editorial

어떤 디자인은 스스로 태어난다, 버내큘러 디자인

도시를 상징하는 것이 거대한 상징물뿐만은 아니다. 도시가 오랜 시간 스스로 선택하고 채워 넣은 일상의 사물들도 그곳의 얼굴이 된다. 수많은 사람이 반복해 사용해 온 물건들은 사람들의 삶을 채우며 어느 순간 한 도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남는다. 한 명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름 없는 이들의 생활과 시간이 완성한 디자인, 여러 도시의 ‘버내큘러(Vernacular)’를 살펴보았다.

*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Mad Men〉 characters with Anthora cups ⒸRemorandom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영화에서 그 도시를 묘사할 때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들이 있다. 파리 카페의 라탄 의자, 뉴욕의 파란 종이컵처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수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반복해서 사용해 온 물건들은 그 자체로 도시를 이루는 조각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물들이 처음부터 거창한 ‘좋은 디자인’을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평범해서 누구도 특별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것들은 오직 실용적이었기에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우리는 흔히 디자인의 전문성을 지닌 누군가의 재능과 의도가 만들어낸 결과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사용되고 변형되며 완성된 디자인도 존재한다. 이를 ‘버내큘러Vernacular’라고 부른다. 누군가 설계한 물건이라도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반복해 사용되고 변형되며, 공동의 시각 언어가 될 수 있다.

삶에서 태어난 디자인, 버내큘러

Installation view of the exhibition 〈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 ⒸMOMA, Photograph by Rolf Petersen

버내큘러라는 말은 라틴어 ‘vernaculus’, 즉 ‘토착의’ 혹은 ‘그 지역에서 태어난’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본래 지역의 일상어와 방언을 가리키던 이 말은 이후 건축과 디자인으로 확장되어, 한 지역의 환경과 생활 방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양식을 설명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널리 알린 인물 중 하나가 건축가이자 비평가인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였’다. 그는 1964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를 열고, 건축의 역사가 과연 유명 건축가와 기념비적 건축물만의 역사인지 질문했다. 전시에는 특정한 설계자의 이름 대신, 지역의 기후와 재료, 오랜 생활의 경험이 축적되어 형성된 토착 건축들이 등장했다. 루도프스키의 관점은 건축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의자와 컵, 가방과 간판 역시 특정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쓰이며 그곳만의 형태와 의미를 얻는다. 버내큘러 디자인은 바로 그렇게, 누군가가 단번에 완성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과 시간이 ​계속해서 다듬어온 디자인을 가리킨다.

도시의 일상이 길러낸 물건들

‘Thank You Have a Nice Day’ plastic bag, New York ⒸMelissa Deckert’s collection

그러한 버내큘러 디자인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뉴욕의 ‘안토라Anthora’ 컵이다. 1963년, 체코 출신의 이민자 레슬리 벅은 당시 뉴욕 식당·델리를 주로 운영하던 그리스계 업주들에게 팔기 위해 그리스 문양을 두르고 “We Are Happy To Serve You”라는 문구를 새긴 저렴한 일회용 종이컵을 만들었다. 비슷한 시절, 뉴욕 골목 델리의 비닐봉지에는 “Thank You / Have a Nice Day”라는 문구가 인쇄되기 시작했다. 두 사물 모두 누가 디자인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뉴요커들의 손을 거치며 어느 순간 안토라 컵을 본뜬 세라믹 제품이 모마 디자인 스토어MoMA Design Store에서 판매될 만큼, 이 일회용 컵은 뉴욕의 일상을 대표하는 디자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Founder Alex Dabagh of Anybag, pictured with his limited edition upcycled bags ⒸAnybag and Daydreams Come True

이 디자인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분명한 디자인 계보를 가진 것들조차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도시 전체의 이미지에 속하며,
동시에 그 이미지에 형태를 부여한다.
개별적인 디자인에서 보편적인 버내큘러로 나아간 것이다.

─ 쇼 시부야(Sho Shibuya)

뉴욕의 비닐봉지 디자인을 수집한 〈Plastic Paper〉의 기획자 ‘쇼 시부야Sho Shibuya’는 이 사물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생활의 결이 담긴 디자인

Red-white-blue bags making their way across the border from Hong Kong to Shenzhen ⒸStanley Wong

아시아의 도시에서도 비슷한 사물을 발견할 수 있다. 홍콩에는 홍백람 백이라 불리는 빨강·하양·파랑 줄무늬의 저렴한 나일론 가방이 있다. 우리도 흔히 사용하는 시장가방처럼 1960년대부터 방수포 원단으로 만들어져 모두가 흔하게 사용해 누구도 특별히 여기지 않던 물건이었다. 이미 홍콩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던 이 사물을 새로운 문화적 상징으로 재해석한 인물이 미술가 ‘스탠리 웡anothermountainman’이다. 그는 2000년부터 이 원단을 활용한 〈redwhiteblue〉연작을 선보였고, 2005년 제51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도 이 작업을 출품했다.

Cafe, Place Colette, Paris ⒸAlamy

파리의 카페 테라스를 채운 라탄 의자도 그렇다. 가볍고 이동이 쉬우며, 손상된 부분을 다시 엮어 수선할 수 있는 라탄 의자는 테라스 영업이 발달한 파리의 카페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메종 드뤼케Maison Drucker’와 ‘메종 가티Maison Gatti’ 같은 공방이 지금도 손으로 짜내는 의자는,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이제는 파리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이 사례들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물건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삶 속을 오래 통과하면 어느 순간 문화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상에서 사물과 사람이 맺는 관계는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되며, 마침내 도시를 상징하는 아이코닉한 풍경으로 각인된다. 그렇기에 이 평범한 기억들이 사라진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물건일지라도 도시의 소중한 무언가가 함께 가라앉아 영영 없어지는 듯한 쓸쓸한 마음이 들 것이다.

도시의 기억을 품은 흔적

그래서 버내큘러는 처음부터 아름다워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삶 곁에 오래 살아남아 기억이 되었기에 아름다워진 것이다. 어떤 디자인은 책상 위에서 정교하게 완성되지만, 어떤 디자인은 거리와 이름 모를 골목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다. 일회용 종이컵에 불과했던 안토라 컵을 하나의 문화로 만든 것이 뉴욕이라는 도시와 시민들이었던 것처럼.

매일 아침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잔을 쥐고, 비슷한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이름 없는 이들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문화라는 거대한 지층을 이룬다. 도시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흔적들의 공간이라면, 우리 곁에 남은 이 사소하지만 강력한 증거들이야말로 ‘좋은 디자인’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34

어떤 디자인은 스스로 태어난다, 버내큘러 디자인

33

시대의 아름다움을 담은 클래식 카, 그리고 그 옆에 선 여성들

32

90cm에 머무르는 소박한 시선, 오즈 야스지로의 미학

31

접시에서 목걸이로, 파블로 피카소와 팔로마 피카소

30

수영장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시선이 만든 총합

29

알도 로시, 도시의 오래된 기억을 모아 그려낸 건축가

28

그로테스크의 귀환, 낯선 것을 추구하는 인간을 위하여

27

그녀들의 시계, 케이스백에 새겨진 드라마

26

나보코프가 발견한 각자의 인생, 자기만의 방

25

무심함의 여행, 조선의 이름 없는 항아리가 바다를 건넌 이야기

24

애플에 앞서, 소니 그리고 모리타 아키오가 있었다

23

위대함이라는 가업, 계승되는 천재성

22

버려진 산업 유산의 미학적 환생, 무덱과 폰다지오네 프라다

21

비요크의 시각적 유산, 그 궤도를 수놓은 비주얼리스트의 연대기

20

날카로운 찰나를 포착했던, 하이엔드 포인트 앤 슛 카메라들

19

어빙 펜에서 더 로우까지, 비워냄의 미학

18

루카 구아다니노가 그린, 에로스와 타나토스

17

걸작은 빈 방에서 태어난다, 도널드 저드와 릭 루빈

16

거장들의 영혼을 깨운 무구한 사물들

15

카를로 스카르파와 아바텔리스의 마법

14

찰나의 실재가 빚어낸 초현실의 미학

13

아름다운 제약, 상상력을 붙잡아두는 창조의 도구

12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법, 움베르토 에코의 웃음

11

오카자키 쿄코와 도시적 에로티시즘

10

우연이라는 완벽한 질서, ‘우연 연산’

09

노력의 흔적을 지우는 기술, 스프레차투라에 대하여

08

미완성과 우연의 초상, 〈휘슬재킷〉

07

악의 미학을 위한 클래식

06

손의 여운, 사물이 살아 있는 시간: 루시엔 데이와 마가렛 호웰

05

첫 권의 문학: 세계를 여는 방식에 대하여

04

연옥 단계의 클래식

03

호모 콜렉투스 – MoMA가 수집한 사물들

02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시지프의 유머

01

조지아 오키프와 마이크로 뷰티

00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