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ial

[High-SENSE] 석윤이 vol.1 타인의 문장에서 시작된 나만의 언어

어떤 책은 읽기 전부터 기억에 남는다. 책등을 따라 이어지는 패턴,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묶는 색, 종이 위에 놓인 글자의 간격.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10여 년간 책을 디자인한 석윤이는 그 작은 차이들을 다뤄왔다. 각각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모습을 찾으면서도, 여러 권을 나란히 놓았을 때 하나의 세계가 드러나도록. 지금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모스그래픽’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모스’를 이끄는 그의 감각은 그렇게 책을 만드는 시간 속에서 자랐다.

Editorial

[High-SENSE] 석윤이 vol.1 타인의 문장에서 시작된 나만의 언어

어떤 책은 읽기 전부터 기억에 남는다. 책등을 따라 이어지는 패턴,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묶는 색, 종이 위에 놓인 글자의 간격.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10여 년간 책을 디자인한 석윤이는 그 작은 차이들을 다뤄왔다. 각각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모습을 찾으면서도, 여러 권을 나란히 놓았을 때 하나의 세계가 드러나도록. 지금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모스그래픽’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모스’를 이끄는 그의 감각은 그렇게 책을 만드는 시간 속에서 자랐다.

Editorial

[High-SENSE] 석윤이 vol.1 타인의 문장에서 시작된 나만의 언어

어떤 책은 읽기 전부터 기억에 남는다. 책등을 따라 이어지는 패턴,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묶는 색, 종이 위에 놓인 글자의 간격.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10여 년간 책을 디자인한 석윤이는 그 작은 차이들을 다뤄왔다. 각각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모습을 찾으면서도, 여러 권을 나란히 놓았을 때 하나의 세계가 드러나도록. 지금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모스그래픽’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모스’를 이끄는 그의 감각은 그렇게 책을 만드는 시간 속에서 자랐다.


석윤이

Ⓒkiosk

editor's note
어떤 책은 읽기 전부터 기억에 남는다. 책등을 따라 이어지는 패턴,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묶는 색, 종이 위에 놓인 글자의 간격.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10여 년간 책을 디자인한 석윤이는 그 작은 차이들을 다뤄왔다. 각각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모습을 찾으면서도, 여러 권을 나란히 놓았을 때 하나의 세계가 드러나도록. 지금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모스그래픽’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모스’를 이끄는 그의 감각은 그렇게 책을 만드는 시간 속에서 자랐다.

그의 이력에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은 순간이 여러 번 등장한다. 작가를 꿈꾸며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타인의 글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일에 마음이 움직였고, 오래 다니려던 회사를 떠난 뒤에는 생각지 못한 독립을 했다. 공들인 시안이 끝내 선택되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그 시안들은 훗날 모스의 제품이 되어 사람들을 만났다. 석윤이는 주어진 일이 달라질 때마다 자신이 배운 것을 다시 꺼내 썼다. 책에서 익힌 색과 구성은 문구와 생활용품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도시의 보행로에도 놓인다. 그 경쾌한 그래픽의 시작을 따라가면, 좋아하는 것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 눈과 손을 함께 길러온 한 사람의 시간이 보인다.


1. 그림을 꿈꾸던 시절, 책을 만나다

— 지금은 책과 그래픽으로 대표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처음 꿈꾸던 일은 화가였다고요. 미술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게 된 장면이 궁금합니다.

어릴 때 가족들과 유럽을 여행하며 미술관에 갔던 기억이 크게 남아있어요. 당시에는 작품들이 모두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어요. 특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봤을 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죠. 그 충격이 오래 남아 미술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그때 산 도록도 무척 아끼며 보관했고요. 성인이 된 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았는데, 어릴 때만큼 큰 감흥은 없더라고요. 작품이 달라진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예술적인 자극을 받기에 가장 좋은 시기에 그 작품을 만났던 것 같아요. 이후 대학에서도 서양화를 전공했고, 오랫동안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알렉스 카츠Alex Katz의 작품도 오래전부터 좋아했고요.

평소 컬러펜과 물감, 드로잉 도구를 즐겨 산다. 당장 쓸 곳이 없어도 자연스레 손이 가는 물건들로, 늘 곁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일상에서 잊지 않도록 한다. Ⓒkiosk

— 그렇게 오래 품었던 꿈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작가의 길에서 방향을 돌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미술을 더 공부하고 싶어 해외 유학을 준비했어요. 집안 사정으로 가지 못하면서 국내 대학원에 진학했죠. 그런데 한 학기를 다녀보니 작가라는 일이 제 성향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업을 시작할 동기와 영감을 계속 제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저는 그 부분이 어려웠거든요. 그렇게 작업을 이어갈 자신이 없더라고요.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 떠오른 것은 일러스트레이션이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일은 계속하고 싶었던 거죠. 그러다 한 날은 서점에 갔는데 출판사 ‘열린책들’이 출간한 ‘아멜리 노통브Amélie Nothomb’의 책들을 보게 됐어요. 한 권씩 보면 서로 다른데, 모아놓으면 같은 시리즈라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고요. 그림과 글을 함께 놓고, 한 권의 책으로 직접 구성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아요.

— 그림에서 책으로 관심이 옮겨간 셈이네요. 그 뒤로 북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어떤 시간을 보내셨는지 궁금해요.

우선 학원에서 편집 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웠어요. 쿼크익스프레스QuarkXPress와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도구를 익혔죠. 작업할 컴퓨터도 마련하고, 코렐 페인터Corel Painter로 표지에 들어갈 그림을 직접 그렸고요. 이미 존재하는 책의 표지를 제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본다거나 가상의 책을 구상해 콘셉트를 잡고, 이를 관통하는 디자인 작업을 계속 시도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출판사 중에서는 열린책들에만 지원했어요. 처음에는 해외 문학을 주로 소개하는 출판사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책을 자세히 볼수록 표지의 실험적인 시도에 마음이 갔거든요.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분명했어요. 합격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입사하게 됐죠. 제대로 된 디자인 실무 경험은 없었으니, 역시나 들어가서부터 고생이 시작됐고요.(웃음)

Ⓒkiosk

— 기술적으로는 배울 것이 많았겠지만, 순수 미술을 공부한 시간이 힘이 되어준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거나 어떤 작업의 느낌을 파악하는 눈은 있었던 것 같아요. 순수 미술을 공부할 때는 새로운 표현 방법과 매체를 계속 시도해야 했거든요. 다른 관점으로 보고, 과감하게 표현하는 일이 익숙했죠. 포트폴리오의 일러스트레이션도 제가 직접 그렸고요. 회사에서는 그런 경험과 가능성을 봐주신 게 아닐까 생각해요.

석윤이의 책상 가까이 자리한 책장에는 영감을 선사하는 해외 서적들이 꽂혀있다. 파이돈에서 출간한 〈Ronan Bouroullec: Day After Day〉, 타셴에서 출간한 〈Andre Butzer, Friedrich Hölderlin. Die Jahreszeiten / The Seasons〉뿐 아니라, 그녀가 애정하는 작가 ‘알렉스 카츠’의 작품집까지. Ⓒkiosk
석윤이 대표의 이름이 새겨진 진공관 앰프.
방송 엔지니어로 일했던 아버지가 퇴직 후 취미로 제작한 것으로,
음악을 좋아해 집 안에 늘 좋은 스피커를 두었던 아버지의 손길이 담겨 있다.
작업실에는 큰 스피커를 놓기 어려워 앰프만 간직하고 있지만, 언젠가 스피커를 연결해 음악을 들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kiosk

—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눈, 그러니까 직감 같은 것은 그저 생기지 않잖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이 필요했었는지 궁금해요.

잘 만든 책을 정말 많이 봤어요. 그냥 넘겨보는 정도가 아니라, 왜 좋아 보이는지 알고 싶어서 하나씩 뜯어봤죠. 서체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자간과 행간은 어떻게 잡았는지, 여백은 얼마나 남겼는지까지 살펴봤어요. 인상적인 부분이 있으면 실제 작업에 적용해보기도 했고요.

저는 특히 프랑스 예술가 폴 콕스Paul Cox의 아트북을 많이 봤고, 파이돈Phaidon과 타셴Taschen에서 나온 책들도 좋아했어요.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여다봤죠.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좋은 책을 계속 보면서 그 안에 있는 질서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석윤이는 마음에 드는 지면을 만나면, 그것이 왜 좋은지 확인하는 데 시간을 썼다.
글자의 크기와 여백, 이미지를 놓는 위치까지.
잘 만든 책을 거듭 들여다보는 동안,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던 눈은 직접 만드는 방법을 익혀갔다.

2. 한 권의 개성, 여러 권의 질서

석윤이가 디자인한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이 작업으로 ‘2016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그래픽 부문과 ‘2016 올해의 출판인상’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했다. ⒸMOHS
석윤이 대표가 디자인한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각기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작가의 얼굴에 서너 가지 색을 조합해,
25권의 표지를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완성했다. 열린책들 입사 3년 차에 맡아 부담이 컸던 프로젝트지만,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MOHS

— 대표님이 처음 열린책들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가 시리즈의 일관성이었죠. 직접 전집과 시리즈를 맡게 됐을 때는 무엇부터 생각했나요?

열린책들은 한 작가의 작품을 여러 권 함께 소개하려는 의지가 강했어요. 그래서 개별 책의 내용과 함께 그 작가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여줄지도 처음부터 생각해야 했죠. 로베르토 볼라뇨Roberto Bolaño 컬렉션에서는 한 일러스트레이터와 여러 권을 함께 작업했고, 조르주 심농Georges Simenon의 매그레 시리즈는 서체와 색을 정해 꾸준히 사용했어요.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프로젝트 때는 그래픽 모티프와 심볼을 개발해 적용했어요. 책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전체를 함께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작업이었죠. 지금 돌아보면 브랜드의 정체성을 만드는 일과 가까웠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흔하지 않았지만요.

실크스크린의 느낌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책. 코팅하지 않은 종이의 질감이 의도한 분위기를 살리고, 색판이 조금씩 어긋난 부분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석윤이 대표에게 일본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포장지를 비롯한 다양한 지류에 대한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MOHS
ⒸMOHS

— 프랑스 현대문학을 묶은 ‘블루 컬렉션’은 책등만 보아도 하나의 인상이 남습니다. 대표님의 최애 컬렉션이라고요.

맞아요. 프랑스 현대문학이 지닌 모던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고, 표지에서 현대미술 같은 분위기도 느껴지길 바랐어요. 중심이 되는 색을 파란색으로 정하고, 그래픽을 중심으로 간결하게 구성했죠. 각 책의 특성은 살리되 컬렉션 전체의 분위기는 이어지도록 했어요. 특히 겉표지를 벗겼을 때 드러나는 책등을 신경 썼어요. 거기에는 제목을 넣지 않고, 겉표지의 그래픽을 아주 단순하게 줄인 패턴을 적용했죠. 여덟 권을 모두 책장에 꽂으면 그 패턴만으로도 블루 컬렉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요. 한 권씩 볼 때와 여러 권을 함께 볼 때의 인상을 모두 생각한 작업이었어요.

— 지금 모스의 제품에서도 서로 다른 색들이 함께 놓였을 때의 조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색을 다루는 기준과 감각 역시 그 시기에 만들어졌나요?

전집과 시리즈를 디자인하며 팬톤 별색을 써본 경험이 컸어요. 일반적인 단행본은 제작비와 공정 때문에 별색을 자유롭게 쓰기 어렵거든요. 그런데 열린책들에서는 시리즈의 핵심 색을 표현할 때 별색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줬거든요. 그 덕분에 결과물도 좋았고 독자들의 반응도 좋아서, 나중에는 전집의 책마다 다른 별색을 지정해보기도 했죠. 그 과정에서 색을 많이 배웠어요. 같은 색을 지정해도 어떤 종이에 인쇄하느냐에 따라 실제로 보이는 느낌이 달라지잖아요. 회사가 허용하는 예산 안에서 여러 색을 시도하고, 인쇄된 결과를 직접 확인했어요. 그렇게 쌓인 경험이 지금도 작업할 때 도움이 돼요.

책장에 나란히 꽂힌 여덟 권은 각각의 이야기를 간직하면서도 하나의 인상을 만든다.
석윤이가 시리즈를 통해 익힌 것은 개성을 남겨두면서 전체를 묶는 방법이었다.
종이와 잉크의 관계를 확인하고,
한 권의 색이 다른 책 옆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살피는 일.
훗날 서로 다른 쓰임의 물건을 ‘모스’라는 이름으로 연결할 감각도 이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Alvaro Siza)가 설계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의 석윤이 대표 ⒸYoony Suk

— 책을 만드는 동안 문구와 전시 디자인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열린책들 안에서 맡았던 일의 범위가 꽤 넓었던 것 같아요.

물론 제 업무의 9할은 책을 디자인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회사가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도 운영하다 보니 책 바깥의 일을 접할 기회가 있었죠. 문구 브랜드 ‘미메시스디자인’을 시작할 때 참여해 노트와 다이어리, 메모지 등을 디자인했고, 해외 디자이너들과 협업하기도 했어요.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가 디자인한 필기구 정리함 ‘멘디니 타이디’를 국내에 소개했죠. 미술관의 전시와 팝업에 필요한 현수막, 리플릿, 입장권도 만들었고요. 출판사에 다니면서 그런 일까지 해볼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낯선 일을 만나도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조금씩 생겼죠.

— 그런 시도가 개인의 의욕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당시 회사는 디자이너에게 어느 정도의 역할과 판단을 맡겼나요?

제가 일하던 시기에는 새로운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다른 출판사와 차별화할 수 있는 시도를 환영했고, 디자이너가 대표님과 직접 이야기하며 결정할 수 있었죠. 시리즈와 전집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도 디자인팀의 의견이 많이 반영됐고요. 한 권의 책을 만들 때 디자이너들이 기획과 편집, 제작, 마케팅에 관한 회의에도 모두 참여하는 건 기본이었고요. 덕분에 책을 만드는 과정 전체를 이해하게 해준, 어떻게 보면 저에게는 학교 같은 곳이었어요. 주어진 일을 하면서도 계속 공부하고, 해보고 싶은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현재 스튜디오와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것을 그곳에서 많이 배웠다는 생각을 하고요.

3. 회사를 떠나, 자신의 일을 꾸리다

—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열린책들’을 2018년에 퇴사했어요. 딱 10년을 채웠죠.

저는 원래 정년까지 다닐 생각이었어요.(웃음) 독립하려고 퇴사한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회사 일을 함께 이어가는 게 점점 힘들어졌어요. 집에서도 제 역할을 해야 하고, 회사에서도 맡은 일을 끝까지 잘하고 싶었거든요. 둘 다 열심히 하려다 보니 몸이 많이 지치더라고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스트레스만 쌓이고 일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쯤에서는 잠시 쉬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저에게는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죠.

— 쉼표를 찍기 위해 회사라는 틀을 벗어났지만, 사람 사는 일이 원래 그렇듯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퇴사한 그해 무렵에 ‘모스그래픽’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스튜디오를 오픈했습니다.

퇴사하고 한동안은 주변에서 외주 작업이 밀려들어왔어요. 주로 북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했는데 점점 조금씩 규모가 큰 프로젝트가 들어왔고, 공공기관한테까지도 의뢰를 받게 됐어요. 근데 계약서를 쓰려면 사업자등록증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대단한 이유가 있었다기 보다, 정말 흘러가는 상황을 따르며 정신차리고 보니 제가 급히 해외 스튜디오 이름을 짓고, 사업자등록을 했죠. 처음부터 회사를 세우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들어오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죠.

— 회사를 나와 한 개인이 프로젝트의 주체가 되어 일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잠시 슬럼프가 있었어요. 정말 많은 시안을 만들었는데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선택되지 않았거든요. 열심히 작업한 디자인이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채 사라진다는 게 아쉬웠어요. 언젠가는 이 시안들을 다시 살려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모스 제품을 만들면서 그 시안들을 많이 활용할 수 있었어요. 클라이언트 작업에서는 충분히 펼치지 못했던 표현을 제 브랜드에서는 자유롭게 시도해보고, 그렇게 제품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kiosk

— ‘모스그래픽’ 스튜디오와 별개로 ‘모스’를 정식 브랜드로 출범하신 건 2021년 즈음의 일이죠. 혼자 만들어보던 물건들이 사람들을 만나기까지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프리랜서 시절 스티치 노트를 만든 적이 있어요. 제작하고 남은 것을 지인들에게 선물했는데 반응이 엄청 좋더라고요. 그래서 평소 해보고 싶었던 디자인을 다이어리와 카드, 포장지 같은 제품으로 더 만들어보는 시도를 했죠. 처음부터 브랜드를 론칭하려고 준비한 것은 아니었고요. 우연히 그 소식을 들은 29CM에서 론칭 이벤트를 제안주셨고, 아직 제품 포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로 미팅에 갔는데, 그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본격적으로 브랜드의 운영이 시작 된 거죠. (웃음)

회사의 일이 개인의 일로 바뀌자, 익숙한 디자인에도 다른 조건이 생겼다.
계약을 위해 스튜디오의 이름이 필요했고, 선택되지 않은 시안에는 새롭게 선보일 자리가 필요했다.
모스그래픽과 모스는 그때마다 구체적인 필요에 답하며 모습을 갖췄다.
계획에 없던 독립은, 오래 쌓아온 경험을 자신의 판단으로 펼쳐보는 기회가 되었다.

‘Glass Cup KAFKA’. 프랑스산 유리컵에 예술에서 영감받은 세 가지 디자인을 입혔다.
낮고 넓은 형태의 230ml 컵으로, 일상에서 쓰는 물컵이자 공간에 포인트를 더하는 오브제로 제작했다. ⒸMOHS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석윤이 대표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들려주었다.
담담한 말 속에는 올곧은 신념이 자리했고, 이야기 곳곳에는 긍정의 에너지가 배어 있었다. Ⓒkiosk

— 스튜디오와 브랜드에 함께 쓰는 ‘모스MOHS’라는 이름에는 어떤 생각을 담았나요?

‘보여주다’라는 뜻의 ‘SHOW’를 뒤집어 ‘MOHS’로 만들었어요. 좋은 디자인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죠. 거창한 설명을 읽지 않아도 보는 순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랐거든요. 의미를 어렵게 함축하려고 애쓰기보다 직관적으로 다가가는 디자인을 하고 싶고요. 그런데 SHOW를 그대로 쓰면 너무 평범하잖아요. 저희 나름의 위트를 담아 뒤집어봤어요. 밝고 유쾌하고 경쾌한 것. 모스와 모스그래픽이 지향하는 분위기를 이름에도 담고 싶었어요.

석윤이 대표는 공간을 잘게 나누기보다 한눈에 펼쳐지도록 구성하고, 딱딱한 사무실보다 따뜻한 작업실을 지향한다.
가구는 비슷한 디자인의 대체품보다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오리지널을 고르고, 비교적 부담 없이 바꿀 수 있는 소품으로 변화를 준다.
취향을 마음껏 펼칠 여건이 아니어도 공간을 대충 꾸미는 법은 없다. Ⓒkiosk
사무실 한켠에 자리한 MMK의 모듈 키친. 석윤이 대표는 각 부분의 색상을 직접 지정할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해,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도록 정면은 모노톤으로 정리하고 측면에만 색을 더했다.
작은 키친에도 하나의 가구를 고르듯 그의 취향이 담겨 있다. Ⓒkiosk

— 지금은 염창동에 사무실을 두고 계시죠. 일과 생활을 함께 이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고르는 기준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집에서도 가깝고 아이의 초등학교에서도 가까운 곳을 찾았어요. 아이를 등교시키면서 저도 출근할 수 있는 동선이 중요했죠. 한동안은 집에서 일하다가 지금 사무실로 옮겼어요. 출근하면 차 한 잔을 마시고 밤사이에 온 메일을 확인해요.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사무실도 정리하죠. 저는 주변이 어질러져 있으면 집중이 잘 안 돼요.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그렇게 정리하다 보면 디자이너들이 출근하고, 오전 9시부터 함께 일을 시작해요.

독립을 결심하기에 앞서 석윤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일과 생활을 함께 이어갈 방법이었다.
지금의 사무실은 아이의 등굣길과 자신의 출근길이 만나는 곳에 있다.
차를 마시고 창문을 열고,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아침.
모스의 밝은 색들은 그렇게 정돈된 하루 속에서 만들어진다.

09

[High-SENSE] 석윤이 vol.3 석윤이의 라이프스타일 아이템 5

08

[High-SENSE] 석윤이 vol.2 모스, 그래픽이 일상이 되는 방식

07

[High-SENSE] 석윤이 vol.1 타인의 문장에서 시작된 나만의 언어

06

[High-SENSE] 이석우 vol.3 이석우의 라이프스타일 아이템 5

05

[High-SENSE] 이석우 vol.2 기능과 아름다움 사이, 이석우가 지키는 것

04

[High-SENSE] 이석우 vol.1 하나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03

[High-SENSE] 김미재 vol.3 김미재의 라이프스타일 아이템 5

02

[High-SENSE] 김미재 vol.2 김미재가 브랜드를 다루는 법

01

[High-SENSE] 김미재 vol.1 도쿄의 잡지, 런던의 물성, 서울의 리듬

00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