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카를로 스카르파의 아름다운 혼돈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에서 태어나 미로 같은 골목과 운하를 걷고 자란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는 자연스럽게 흐름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되었다. 젊은 시절 그는 무라노Murano 섬의 유리 공방들과 긴밀하게 일하며 빛을 머금고 굴절시키는 물질의 감각을 몸으로 익혔다. 그 경험은 훗날 그가 공간을 다루는 방식 즉, 빛이 어떤 각도로 돌의 표면을 어루만져야 하며 재료와 재료가 만나는 이음새를 어떻게 보석처럼 다루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감각적 토대가 되었다.

이는 클라이언트의 넉넉한 예산 덕분에 건축적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고. ©Mili Sánchez Azcona
근래 그의 이름이 다시금 주목받은 이유는 영화 <듄: 파트 2>의 주요 촬영지가 된 그의 브리온 가문 묘역Brion Tomb 때문이다. 베네치아를 형상화한 물길이 죽음을 위한 공간을 따라 흐르고 빛과 기하학적 구조가 주는 아름다움이 그곳을 기묘하고 성스럽게 만든다.

특히,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이중 고리 구조는 브리온 부부의 결합을 상징한다. ©Mili Sánchez Azcona
여기에서 두 가지 개념을 배울 수 있다. 베시카 피시스Vesica Piscis. 두 원이 겹친 교차점, 죽음의 문턱을 장식하는 신성한 기하학과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전시와 배치의 철학 ‘알레스티멘토Allestimento’가 그의 건축적 뼈대임을 알게 된다.
폐허 위에 세운 현대적 시


시칠리아 팔레르모Palermo의 좁은 골목을 지나 마주하게 되는 아바텔리스 미술관Palazzo Abatellis은 15세기 고딕-카탈루냐 양식의 궁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파괴되었다. 1953년, 미술관장의 초청으로 스카르파는 단순히 건물을 고치는 복원을 넘어서서 낡은 석조 벽체와 현대적인 금속, 매끄러운 목재를 대조시키며 시간의 층위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바우하우스Bauhaus의 수장 발터 아돌프 게오르크 그로피우스Walter Adolph Georg Gropius가 이곳을 보고 내 생애 가장 뛰어난 박물관이라 찬탄했다고 한다. 박제된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전시한다’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전시 예술을 앞장서서 이끈 스카르파는 건축물 그 자체를 하나의 전시물로 대하며 과거의 흔적에 무언가를 덧대어 현대의 것으로 창조했다.
거대한 프레스코화, 죽음의 승리를 위한 무대

아바텔리스 미술관의 심장은 단연 <죽음의 승리Trionfo della Morte>가 걸린 거대한 홀이다. 옛 궁전의 예배당이었던 높은 홀에 이 벽화를 배치하기 위해 스카르파는 치밀한 알레스티멘토를 감행했다. 그는 인위적인 조명 대신 창을 통해 들어오는 시칠리아의 자연광이 프레스코화의 질감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도록 설계했다. 특히, 그는 거대한 그림을 벽에 직접 붙이지 않고 특수 프레임을 통해 미세하게 띄워 설치했다. 이 틈새 덕분에 무거운 중세의 유물은 마치 공간 속에 부유하는 환영처럼 보이며, 관람객은 공간이 뿜어내는, 기묘하고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라우라나의 방과 수태고지: 빛의 연극

조각가 프란체스코 라우라나Francesco Laurana의 마리아 흉상이 있는 방에서 스카르파는 빛의 방향을 치밀하게 계산했다. 조각상은 방 한가운데가 아니라 모서리 근처에 비스듬히 놓여,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이 조각의 섬세한 굴곡을 따라 흐른다. 짙은 녹색 회벽은 하얀 대리석 조각의 아름다움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의 걸작 <수태고지Annunziata>를 위한 연출 또한 놀랍다. 스카르파는 특별한 나무 패널과 금속 지지대를 제작해 작품의 뒤쪽과 측면을 열어두었다. 관람객은 그림 주위를 돌며 공간감을 느낄 수 있고, 작품 속 성모 마리아와 완벽하게 눈을 맞추며 직접 소통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비밀스러운 거리두기와 조인트의 미학

아바텔리스를 걷다 보면 스카르파가 새로 세운 벽이나 전시대가 원래 있던 고딕 양식의 오래된 벽과 결코 완전히 맞닿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 항상 틈새를 남겨두었다. 이탈리아어로 스쿠레토Scuretto라 불리는 이 그림자 틈새는 과거를 존중하여 덮는 대신 살짝 비켜선 경의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는 지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보석처럼 디자인했다. 돌과 철, 나무와 유리가 만나는 이음새Joint를 노출함으로써 관람객은 현대와 중세라는 두 시간의 층위를 동시에 인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카르파가 설계한 시간의 경계선이다.
발걸음으로 읽는 지도와 육각형 계단

스카르파는 관람객이 바닥을 보지 않고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를 원했다. 그는 공간의 성격이 바뀔 때마다 바닥의 재료를 미묘하게 바꾸어 발바닥에 닿는 촉감의 변화로 새로운 장에 들어왔음을 직감하게 했다.


미술관 내부의 육각형 계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건축적 조각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빛의 각도가 달라지고, 시야에 들어오는 유물의 각도가 변한다. 계단 난간의 금속 이음새부터 발바닥에 닿는 돌의 질감까지, 스카르파는 올라간다는 행위를 전시의 동선에 포함했다.
현장에서 빚어낸 집착의 미학


이런 세세한 것들에 대한 집착은 사물 그리기를 좋아해 처음 회화로 시작했던 그의 이력과 맞닿아 있다. 그는 현장에서 살며 손 도면을 그리고 빛의 흐름을 관찰했는데, 건축가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 물건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사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바텔리스 미술관은 수백 년 된 돌벽이 현대적인 금속 이음새를 만났을 때 얼마나 세련될 수 있는지, 그리고 빛이 조각상 위에서 어떻게 내리쬐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나는 오직 내 눈이 즐거운 것만을 만든다. 내가 즐거워야 다른 사람도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 카를로 스카르파
이 박물관을 포함하여 스카르파의 작업은 모더니즘과 일본 미학, 그리고 신화적 상상력의 언어까지 끌어안으며 아틀란티스의 흔적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혼돈을 만들어낸다. 이미 사라졌지만 분명 존재했던 고도의 문명 세계를 연상시키는 이 공간들은 우리에게 보는 법을 다시 가르쳐준다.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우리가 무심코 만지는 문손잡이와 발끝에 닿는 계단의 각도에 깃든 정성을 발견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