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출처를 알 수 없는 서사의 매력



ⒸRolexMagazine Photo by Jake Ehrlich


흔히 알려진 시계들의 이야기들은 대게 명확하다. 예를 들어 케이스 뒷면에 “나를 위해 안전하게 운전하세요 DRIVE CAREFULLY ME” 라고 새겨진, 아내가 준 미국의 배우 폴 뉴먼Paul Newman의 롤렉스Rolex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Cosmograph Daytona’, 〈르망Le Mans〉 촬영을 위해 착용한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의 태그호이어TAG Heuer ‘모나코Monaco’. 이 외에도 달에 갔거나 여러 인상 깊은 순간에 동행한 시계는 착용 사진과 함께 전설이 된다. 반면 역사 속 여성들의 시계는 베일에 싸여 있다. 그 불분명함 속에 숨겨진 이야기는 시간을 오직 손목 위 시계로만 확인해야 했던 시절의 서사를 떠올릴 때 더욱 깊어진다. 당시의 시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내밀했고, 일상과 밀착되어 있었다. 과거를 기념하고, 현재의 감정을 감추거나 드러내며, 때로는 미래의 시간까지 담보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 손목 위의 시계


(오) Bulgari ‘Serpenti’ watch ⒸBulgari
1962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로마에서 영화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촬영에 한창이었다. 당시 그녀의 손목에는 불가리Bulgari의 세르펜티Serpenti가 감겨 있었다. 뱀이 몸을 휘감듯 팔을 두 바퀴 돌아 머리 부분에 시계 판을 숨긴 형태는 화면 밖에서도 그녀를 클레오파트라로 만들었다. 이 시계가 어떤 경로로 그녀의 손목에 도착했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당시 남편이었던 에디 피셔Eddie Fisher의 선물이라는 설과, 촬영장에서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진 상대 배우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이 건넸다는 설이 팽팽하다. 혹은 “큰 여자들에게는 큰 다이아몬드가 필요하다Big girls need big diamonds”라는 말을 남겼던 그녀답게 스스로를 위해 구매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실제로 불가리의 자체 아카이브 기록에도 “누가 구입했는지 알 수 없다”고만 적혀 있다.

테일러는 자신의 보석 컬렉션 이야기를 모은 회고록 ‘나의 사랑, 그리고 보석My Love Affair with Jewelry’에서 로마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찍는 가장 큰 이점은 비아 콘도티의 불가리 매장이었다고 썼다. 파파라치를 피해 뒷문으로 드나들었고, 불가리의 비밀 공간에서 보석을 골랐다. 그리고 그 방에 누가 함께 있었는지는 사람들의 상상을 계속 자극한다. 이 살짝 가려진 출처는 시계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2011년 영국 런던의 크리스티Christie's 경매에 이 시계가 출품되었을 때, 전문가들의 예상 감정가는 1만 2천~1만 5천 달러한화 약 1,700만 원 ~ 2,200만 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실제 낙찰가는 무려 97만 4,500달러한화 약 11억 원. 손목에 얽힌 비밀의 가격이 예상가를 65배나 뛰어넘게 만든 것이다. 불가리는 이 극적인 서사를 잊지 않고 테일러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2010년, 세르펜티의 현대판 모델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 시계의 케이스백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엘리자베스 경에게, 감사를 담아
-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이혼의 해에 선택한 독립: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까르띠에 탱크


이 시계는 기묘한 서사적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브랜드의 의도였는지 공교로운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영국의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Diana, Princess of Wales가 이혼을 공식화하던 1996년 까르띠에Cariter는 현대적인 ‘탱크 프랑세즈Tank Française’를 출시했고, 그녀는 오랜 시간 차던 시계를 벗고 이 시계를 손목에 얹었다.

결혼 생활 내내 그녀의 손목을 지켰던 것은 찰스 왕세자가 스무 살 생일 선물로 준 파텍 필립 Patek Philippe의 칼라트라바Calatrava였다. 왕세자비 시절 공식 석상에서 남편의 시계와 나란히 겹쳐 차며 애정을 증명하듯 보여주었던 바로 그 시계. 그러나 이혼 이후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친정아버지 스펜서 백작Earl Spencer에게 받은 탱크 루이Tank Louis와, 새로 출시된 탱크 프랑세즈Tank Française였다.



탱크 프랑세즈는 기존 모델들보다 각이 더 선명하게 살아있고 브레이슬릿 일체형으로 디자인되어 우아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준다. 말년의 다이애나가 즐겨 입던 슬리브리스 테일러드 재킷, 과감하게 자른 단발 숏컷, 그리고 탱크 프랑세즈는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맞아떨어졌다. 손목 위의 시계 하나로 영국 왕실의 아내가 아닌, ‘인간 다이애나’로 살겠다는 주체적인 선언을 감행한 셈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시계는 아들 윌리엄 왕세자William, Prince of Wales에게 상속되었다가 이후 동생 해리 왕자Prince Harry, Duke of Sussex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2017년, 해리 왕자는 이 시계를 자신의 아내 메건 마클Meghan Markle에게 선물했다. 한 여성이 왕실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했던 독립의 상징이, 역설적으로 다시 왕가로 돌아갔다가 또 다시 떠났다.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은 비밀: 마릴린 먼로와 블랑팡

모든 사람이 항상 나를 잡아당겨요.
다들 나의 한 조각을 떼어가고 싶어 하죠.
-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Ed Feingersh,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아마도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찍힌 여성 중 한 명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아카이브에서도 그녀가 ‘블랑팡Blancpain칵테일 워치’를 차고 있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시계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그녀가 사망한 후, 연기 스승이었던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되었다. 아르데코 스타일의 직사각형 케이스에 총 73개의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칵테일 워치로 예상외로 화려한 장신구를 즐기지 않던 먼로의 취향을 고려하면 의외의 시계였다. 먼로는 “다이아몬드가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스크린에서 노래했지만 정작 자신은 귀금속을 거의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계 역시 출처가 불분명한데 세번째 남편이자 극작가였던 아서 밀러Arthur Miller가 선물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공식 석상에서 한번도 차지 않았기에 이런 저런 설이 뒤따라 다녔다.


먼로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나를 사람이 아닌 거울처럼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본 게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들여다봤다.” 아무도 없는 사적인 공간에서만 홀로 착용했을 그 사진이 없는 시계는 거울 뒤에 살았던 실제 먼로와 닮아 있다. 2016년 미국 경매사 줄리언스 옥션Julien's Auctions에 이 시계가 나왔을 때 22만 5,000달러한화 약 2억 6천만 원에 낙찰을 받은 주인공은 블랑팡 본사였고 시계를 회수한 뒤 뉴욕 부티크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실물을 선보였다. 복원된 시계의 스트랩은 세상을 뒤흔든 먼로의 손목이 얼마나 가늘고 가녀펐는지를 증명하듯 아주 작은 직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중에게 모든 사생활이 전시됐지만 그럴수록 내면은 철저히 숨겨야 했던 먼로에게 이 블랑팡 시계는 누구에게도 침범받고 싶지 않았던 유일한 비밀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사를 보관하는 케이스백

오늘 소개한 여성들의 시계는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담고 있다. 예상치 못한 경매장의 높은 낙찰가는 그 보관된 것들이 지닌 미스터리함의 가치다. 소유했던 이들은 모두 떠났지만, 시계 이면에 새겨진 드라마와 비밀스러운 시간은 이제는 결코 열리지 않을 케이스백 너머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