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고전적 아카이브, 동굴에서 나온 것들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단어는 동굴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그로타Grotta’에서 유래했다. 15세기 말 로마, 땅속에 파묻혀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가 우연히 발견된다. 당시 사람들은 밧줄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 횃불로 벽을 비춰보았는데 그곳에는 누구도 본 적 없는 기이한 장식 언어가 가득했다. 흰 배경 위에 켄타우로스, 날개 달린 스핑크스, 환상적인 수중 생물들이 뒤섞여 실재하는 것과 허구의 상상이 벽면 위에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인체와 짐승과 식물이 뒤섞인 이 벽화들은 동굴에서 나온 기이한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로테스크’라 불리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미술사가 조르조 바자리는 이 발견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and Giovanni da Udine (1487–1564, Italy). Loggetta of Cardinal Bibbiena, Palazzi Pontifici, Vatican, detail of wall with grotesques (c. 1516). Fresco. ⒸScala, Florence/Art Resource, NY
조반니가 라파엘로와 함께 그것들을 보러 갔을 때,
두 사람 모두 그 작품들의 신선함과 아름다움, 그 탁월함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조반니는 그것들을 너무나 많이 스케치하여 항상 방대한 양의 드로잉을 손에 쥐고 있었다.
─ <예술가 열전> 중 '조반니 다 우디네의 생애' (1550)


Domus Aurea, detail of cryptoporticus grotteschi, Goldschmidt Scrapbook (early to mid-16th centur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를 발견한 당대 최고의 화가들은 이를 단순히 구경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벽면의 도상을 치열하게 스케치하며 동굴을 일종의 거대한 아카이브로 삼았다.


그중 한 명이었던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는 그곳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1519년 바티칸 궁전Vatican Palace의 벽면을 장식했다. 기이하고 변덕스러운 환상이 왜 아름다울 수 있는지, 왜 세상에 그려져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녹여낸 결과물이었다. 당시 라파엘로가 절친한 친구 발타사레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glione에게 보낸 편지에는 예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아름다운 여성을 그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아름다운 여성들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안목을 지닌 자도 아름다운 여성도 모두 귀한 탓에,
저는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관념Certa Idea에 의지하곤 합니다.
도무스 아우레아의 벽화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낯선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결과물로 길어 올리는 것은 이런 방향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카이브는 목적지가 아닌 출발점

디자인 스튜디오 2×4의 설립자 마이클 록Michael Rock은 2026년 발표한 에세이 〈No Time Like the Present〉에서 이 오래된 일화를 직접 꺼냈다. 그는 현대 패션과 AI가 아카이브를 소비하는 방식을 언급하며, 과거 라파엘로가 동굴 속에서 행했던 탐색과 지금의 디자이너들이 처한 현실을 대조한다. 오늘날 ‘그로테스크’를 검색하면 고고학 사진, 라파엘로의 드로잉, 관련 학술논문들이 동시에 노출된다. 이제 모두가 어두운 곳에 밧줄을 타고 내려가지 않아도 이미 동굴 안에 앉아 있다. 지식은 키워드 유사도 순으로 배열되고, 역사는 연대기가 주는 울림 없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처럼 검색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라파엘로’, ‘그로테스크’, ‘미래주의’ 같은 단어들을 무작위로 입력하면, AI는 즉시 그럴듯한 이미지를 생성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각각의 레퍼런스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맥락과 방향성은 읽어내지 못하고 출처 없는 새로운 뭔가가 등장한다. 마이클 록은 이를 두고 날카로운 표현을 남겼다. “AI는 패턴을 인식하지만 의미는 읽지 못한다. 기억 없는 인용Allusion without Memory”이다.
우리 눈 앞에 놓여진 AI라는 거대한 동굴
결국 문제는 기술이나 AI 자체가 아니다. 정보에 도달하는 속도는 인간의 통찰이 될 수 없고, 무한한 데이터에 닿는 접근이 곧 본질에 대한 이해를 담보하지도 않으며, 유사성을 찾아내는 패턴 인식이 역사의 맥락을 읽어내는 지식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도구의 등장과 그에 따른 저항 속에서 ‘인간다움’을 정의해 온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저 새롭다는 이유로 찬양하거나, 기괴하다고 쉽게 외면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낯선 아름다움 속에서 도리어 이를 집요하게 곱씹었던 라파엘로의 시간이 주는 미덕이 있다. 언제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천 년의 동굴을 눈앞에 두고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만의 횃불을 든 채 낯선 것을 응시하며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 낼 것인지, 아니면 잔해를 끝없이 재배열하는 것에 머무를 것인가. 동굴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고, 선택은 다시 인간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