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같은 목소리, 세 개의 공기

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자신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창작을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언어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 샤를로트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의 음악을 듣다 보면 그 문장이 떠오른다. 1971년 런던에서 태어나 세르주 갱스부르Serge Gainsbourg와 제인 버킨Jane Birkin의 딸로 세상에 알려진 그녀는 열다섯에 아버지와 함께 첫 앨범을 내고 스무 해 가까이 음악에서 멀어져 있었다. 2006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돌아온 이후 그녀의 음악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보다 목소리가 머무는 공간을 바꾸는 방식으로 삶의 어느 시점마다 새로운 앨범을 냈다. 그래서 그녀의 디스코그래피를 따라가는 일은 세 개의 각기 다른 방을 차례로 열어보는 것과 같다. 그 방의 이름은 〈5:55〉, 〈IRM〉, 그리고 〈Rest〉다.
첫 번째 방, 〈5:55〉


〈5:55〉라는 제목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시간의 감각이다. 새벽 5시 55분. 밤과 아침의 경계. 프랑스의 전설적인 일렉트로 팝 듀오 ‘에어Air’의 장 브누아 뒹켈Jean-Benoît Dunckel과 니콜라 고댕Nicolas Godin이 전곡을 작곡하고 나이절 고드리치Nigel Timothy Godrich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가사는 자비스 코커Pulp와 닐 해넌The Divine Comedy이 썼다. 그 위에 놓인 샤를로트의 목소리는 노래를 이끌기보다 방 안에 스며든다. 이 앨범을 듣고 나면 멜로디보다 공기가 먼저 남는다. Air의 신시사이저는 여백을 섬세하게 펼쳐놓고 그 위에서 그녀의 작은 숨소리와 낮은 톤, 문장 끝의 여운이 음악의 일부가 된다. 목소리가 주인공이 될 때 곡과 곡 사이의 공백도 음악이 된다. 마치 그녀가 싱어송라이터처럼 이 곡들을 흥얼거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사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5:55〉는 샤를로트 갱스부르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앨범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음악을 대하는지 처음 보여준 앨범이다. 첫 번째 방에 가득 찬 흥얼거림은 누군가 조용히 열어놓은 방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두 번째 방, 〈IRM〉


두 번째 방은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2007년 샤를로트는 수상스키 사고로 뇌출혈을 겪고 긴급 수술을 받았는데 회복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들어가야 했던 MRI 촬영의 기계음과 폐쇄된 공간의 감각이 이 앨범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IRM은 MRI의 프랑스어 약어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벡Beck은 기존 곡을 다시 부른 ‘Le Chat du Café des Artistes’를 제외한 곡들을 쓰고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했다. 타이틀곡 〈IRM〉에는 실제 MRI 기계의 윙윙거리는 소음이 샘플링되어 리듬 속에 파묻혀 있고, 거친 기타와 전자음을 배치했다. 그 안에서 과장하지 않는 샤를로트의 목소리는 오히려 다른 사운드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앨범에는 거친 록과 전자음뿐 아니라 정적인 포크와 어쿠스틱 사운드도 함께 놓여 있다. 하나의 방 안에 벽마다 다른 벽지가 붙여져 있는 듯하다. 샤를로트는 후에 이 앨범이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벡의 시선이었지 자신의 시선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이 설계한 방의 골조에서 그녀는 목소리의 전달력만으로 전체의 균형을 잡는다.
세 번째 방, 〈Rest〉

세 번째 방은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라, 제목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앨범을 듣게 되면 첫 음이 흐르기 전부터 다르게 들린다. 2013년, 이복언니이자 패션 사진가인 케이트 배리Kate Barry가 세상을 떠났다. 그 상실이 샤를로트가 가지고 있던 부재에 대한 기억들을 이끌어내어 이 앨범을 쓰게 했다.

프랑스의 일렉트로닉 음악가이자 프로듀서, 세바스찬SebastiAn의 차가운 전자음과 단단한 리듬 위에서 샤를로트는 처음으로 대부분의 가사를 직접 썼다. 프랑스어와 영어가 교차하고, 아버지 세르주에 대한 기억과 언니의 부재가 직설적으로 담겼다. 상실과 애도는 앨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음악은 과거에 침잠하는 느낌은 아니다. 언니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수록곡 ‘Kate’은 멜로디는 역설적으로 맑고 경쾌하게 흘러가는데 가사의 내용은 노래의 첫 구절인 ‘Un goût de sel’은 직역하면 ‘소금의 맛’으로, 곧 눈물의 맛을 의미한다.

아버지 세르주가 세상을 떠난 날 침대 곁에 누워 시신을 마주했던 열아홉의 기억으로 지은 ‘Lying With You’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반복하며 기억과 현재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바꾼다. 샤를로트는 이전 인터뷰에서 영어로 노래하는 일이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자유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반대로 〈Rest〉를 만들 때는 어떤 말들은 프랑스어로만 쓸 수 있었다고 밝혔다. 과거에는 영어가 거리를 만드는 언어였다면 이 앨범에서는 프랑스어가 가장 가까운 기억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앨범 제목에도 두 방향의 의미가 겹쳐 있다.

앨범 제목 〈Rest〉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영어 ‘rest’는 휴식과 영면을, 프랑스어 ‘reste’는 ‘머물러달라’는 뜻으로 떠나간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과 가장 간절한 미련이 하나의 단어에 담겼다. 이 앨범은 이전 두 장에서 타인의 언어를 빌렸던 샤를로트가 자신의 기억을 직접 문장으로 옮기기 시작하며 목소리와 방의 주인이 처음으로 같은 사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Rest〉는 세 번째 방이면서 비로소 자기 손으로 지은 첫 번째 방이기도 하다.
세 개의 방을 지나며

자비스 코커와 닐 해넌의 언어에 머물렀던 〈5:55〉. 벡의 시선과 서늘한 기계음으로 구축된 〈IRM〉. 마침내 자신의 문장으로 채운 〈Rest〉. 세 장의 앨범을 지나오는 동안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목소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삶이 움직일 때마다 그 목소리가 머무는 공간은 달라졌다. 타인이 마련한 방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던 그녀는 마지막 방에 이르러 자신의 기억으로 벽을 세우고 두 개의 언어로 문을 달았다. 그다음 문이 열린다면 그곳에는 어떤 공기가 머물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