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슈타이너의 거실에 걸린 정물


1890년 볼로냐Bologna에서 태어난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가 바라본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작았다. 그는 평생 도시를 멀리 떠나 새로운 대상을 찾는 대신, 볼로냐 작업실에 있는 몇 개의 병과 그릇을 계속 옮기고 다시 바라보았다. 병 하나가 조금씩 앞뒤로 움직이고, 사물들은 가까웠다가 멀어지고, 빛의 각도가 달라지는 것만으로 장면의 느낌이 바뀌었다.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사물에게 남는 의미란 표면과 부피, 색뿐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사물을 어떤 시야로 바라보는가가 느껴진다.

“세상을 다 돌아다녀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란디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1960)의 주인공 마르첼로Marcello는 지식인 슈타이너Steiner의 집을 방문한다. 책과 음악, 예술에 관한 대화로 채워진 실내에는 모란디의 정물이 걸려 있다. 바깥의 로마가 자동차와 플래시, 파티와 소문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동안 이 방은 멈춰있다. 슈타이너가 자신의 삶을 취향껏 고른 사물들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듯, 벽에 걸린 모란디의 정물 역시 그가 동경하는 세계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 후반의 비극을 알고 다시 이 장면을 보면, 그 고요함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펠리니가 모란디의 정물을 그 방에 놓은 순간, 슈타이너의 집은 하나의 정물화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사물은 제자리에 있고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지만, 그 안의 삶은 그림처럼 멈춰있을 수 없었다.
화가가 떠난 자리의 사물들


1938년 뉴욕에서 태어난 사진가 조엘 메이어로위츠Joel Meyerowitz는 볼로냐의 작업실을 촬영해 〈Morandi’s Objects: The Complete Archive of Casa Morandi〉(2016)라는 사진집으로 묶었다. 모란디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곳에는 그림 속에서 반복해 등장했던 병과 깡통, 꽃병과 주전자가 남아 있었다. 메이어로위츠의 사진은 모란디의 정물을 그대로 다시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림 뒤에 있던 물건들의 실제 모습에 하나하나 시선을 두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모란디의 그림에서는 형태와 색으로만 남았던 사물들이 다시 하나의 물건으로 돌아온다. 그림을 만들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사진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모란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이 모란디의 그림에서 멀어질수록 오히려 그의 시선은 더 선명해진다. 그저 평범한 병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병의 목 부분에 남은 작은 흔적과 빛을 받는 면을 바라보다 보면, 이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사물의 표면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화가는 사라졌지만, 그가 오래 바라본 대상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화가의 부재를 느끼면서도, 그 사물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그림 밖에서 이어지는 시선

존경하는 예술가를 오마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의 이미지를 닮는 것이다. 모란디라면 회색과 베이지색을 쓰고 빛바랜 병 몇 개를 나란히 세우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모란디의 이미지를 단순히 기억하는 방향이다. 펠리니는 모란디의 화면을 복제하지 않고 그 그림을 한 사람의 생활 공간 안에 놓았다. 메이어로위츠는 반대로 그림을 벗어나 실제 사물로 돌아갔다. 한쪽에는 모란디의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모란디가 바라보았던 사물이 있다. 여기에 부재의 정물이라는 감각, 앞서 말했던 나투라 모르타Natura Morta가 다시 떠오른다.

미국의 모더니즘 미술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가 흰독말풀 한 송이를 확대해 작은 꽃의 표면에 시선을 붙잡아 두었다면, 모란디는 병 몇 개의 간격 안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을 접어 넣었다. 다루는 사물은 다르지만 작은 것 앞에 오래 머무는 두 화가의 시선은 묘하게 닮았다.


볼로냐에 남아 있는 모란디의 작업실에는 더 이상 주인이 없다. 그의 그림이 걸린 영화 속 거실에도, 메이어로위츠의 사진에도 그는 없다. 대신 병들이 남아 있다. 아직도 사물 사이의 좁은 틈과 오래된 표면 위로 빛이 지나간다. 나투라 모르타. ‘죽은 자연’이라 불리던 사물은 화가가 사라진 뒤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다만 그것을 매만지던 손이 사라졌을 뿐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한 사람이 오래 바라보았던 것을 함께 지켜보는 것이다. 화가는 사라졌고 사물은 그대로 남아 그 앞에서 시선만 잠시 느려진다.
조르조 모란디 작품이 궁금하다면? 《조르조 모란디》 전

전시 기간 | 2026. 11. 21 (토) ~ 2027. 3. 1 (월)
주소 | 더현대 서울 ALT.1
주최 | 모란디 미술관, SBS, ㈜하지
협력 | 주한이탈리아대사관, 주한이탈리아문화원, 볼로냐 시, 몬도 모스트레, 더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