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ial

잠들지 못한 화가, 거울 속을 산책하다

밤의 산책은 어둠이 허락하는 가벼운 무책임함과 자유로움을 우리에게 준다. 1908년, 한 화가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홀로 해안을 걸었고, 방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도시와 거울 앞의 자신을 그렸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보아도 그의 그림은 오래된 회화보다 밤거리에서 우연히 찍힌 흑백사진에 가까워 보인다. 벨기에 화가 레옹 스필리아르트가 반복해서 바라본 것은 모두가 돌아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이었다. 그의 그림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기 위해, 그가 걸었던 밤과 길었던 새벽을 따라가 보았다.

Editorial

잠들지 못한 화가, 거울 속을 산책하다

밤의 산책은 어둠이 허락하는 가벼운 무책임함과 자유로움을 우리에게 준다. 1908년, 한 화가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홀로 해안을 걸었고, 방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도시와 거울 앞의 자신을 그렸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보아도 그의 그림은 오래된 회화보다 밤거리에서 우연히 찍힌 흑백사진에 가까워 보인다. 벨기에 화가 레옹 스필리아르트가 반복해서 바라본 것은 모두가 돌아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이었다. 그의 그림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기 위해, 그가 걸었던 밤과 길었던 새벽을 따라가 보았다.

Editorial

잠들지 못한 화가, 거울 속을 산책하다

밤의 산책은 어둠이 허락하는 가벼운 무책임함과 자유로움을 우리에게 준다. 1908년, 한 화가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홀로 해안을 걸었고, 방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도시와 거울 앞의 자신을 그렸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보아도 그의 그림은 오래된 회화보다 밤거리에서 우연히 찍힌 흑백사진에 가까워 보인다. 벨기에 화가 레옹 스필리아르트가 반복해서 바라본 것은 모두가 돌아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이었다. 그의 그림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기 위해, 그가 걸었던 밤과 길었던 새벽을 따라가 보았다.

*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모두가 잠든 뒤에야 보이는 것들

〈At Night〉, 1908 ⒸMusée d’Orsay

1908년 벨기에의 항구 도시 오스텐더Oostende의 밤을 종이 위에 펼쳐둔 이 풍경은 백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늦은 밤 카메라로 찍었을 법한 장면과 닮아 있다. 검은 바다와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가로등, 어둠 속에 멈춰 선 비틀거리거나 춤을 추고 있을 익명의 사람 하나. 이 밤을 그린 사람은 벨기에 화가 레옹 스필리아르트Léon Spilliaert다. 1881년 북해에 면한 오스텐더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 이 도시를 반복해서 그렸다. 당시 오스텐더는 작은 어촌에서 왕실과 부유한 휴양객들이 찾는 해변 도시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해안을 따라 카지노와 호텔, 긴 산책로와 왕립 갤러리가 들어섰지만 스필리아르트의 그림에서 그런 번화함은 보이지 않고 모두가 사라진 여백이 두드러진다. 

밤을 걷는 사람

〈Kursaal en zeedijk〉, 1908 ⒸMusée d’Orsay

젊은 시절 위장 질환과 불면에 시달렸던 그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홀로 해안과 방파제를 오래 걸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낮 동안 배경에 묻혀 있던 것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세운 난간은 긴 직선이 되고 길을 밝히던 가로등은 검은 면 위에 놓인 작은 빛이 된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에서 사람이 사라지자, 오히려 도시의 형태가 선명해진다. 스필리아르트가 활동하던 1900년대 초 유럽에는 현실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꿈과 불안,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미지로 만들려는 상징주의가 여전히 강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 역시 그 흐름에서 출발했지만, 그의 풍경은 종종 훨씬 뒤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바다와 산책로는 몇 개의 선과 넓은 빈 면으로 줄어들고 사람은 점처럼 작아진다.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도 이러한 정제된 풍경에서 훗날의 미니멀리즘을 예고하는 듯한 면모를 언급한다.

〈Digue la nuit〉, 1908 ⒸMusée d’Orsay

1908년의 〈Digue la nuit〉를 보면 희미한 불빛이 물 위에서 길게 흔들리고 바다와 하늘은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면을 먹으로 칠한 듯한 도시의 농담은 스필리아르트가 자주 사용한 재료의 느낌과도 잘 맞았다. 그는 유화보다 먹과 수채, 파스텔, 색연필 같은 재료를 종이 위에 겹쳐 사용했고 이 작품도 먹을 물에 풀어 칠한 뒤 색연필을 더한 작품이다. 먹은 종이 위에서 가장자리를 조금씩 잃고 바다와 밤은 서로 스며든다.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부분이 오히려 희미한 빛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가 잃은 잠으로 걸어 다닌 밤은 검다기보다 비어 있다. 하늘, 바다, 작은 빛 몇 개가 그의 시간을 채웠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2024년 헤이그 시립 미술관Kunstmuseum Den Haag이 기획한 《Night Wanderers》 전시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지점을 남긴다. 벨기에의 현대 사진가 디르크 브레크만Dirk Braeckman과 스필리아르트를 나란히 세워둔 이 자리는, 백 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두 산책자가 어둠 속에서 발견한 것을 보여준다. 한 명은 먹의 농담으로, 다른 한 명은 렌즈의 시선으로 밤을 표현하지만, 어둠과 그 사이를 메우는 회색의 층위들, 그리고 적막한 여백 속에 떠오르는 희미한 빛이 공통으로 존재한다. 스필리아르트의 그림이 지금의 사진과 닮아 보이는 이유도 단순히 어둡기 때문만은 아니다. 화면 안에 무엇을 더 넣을지보다 어디까지 덜어낼지를 먼저 생각한 듯한 구도 때문이다. 그가 도시를 바라본 방식에는 이미 하나의 프레임이 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대상을 프레임 안에 가두는 현대의 사진상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끝없이 멀어지는 도시

Léon Spilliaert, 〈Vertigo〉, 1908. Ink, watercolor, and
colored pencil on paper. ⒸHugo Maertens

스필리아르트의 풍경을 여러 장 이어서 보다 보면 시선이 자꾸 한쪽으로 끌려간다. 가까운 것은 유난히 크게, 먼 것은 순식간에 작아지는 그의 원근법은 〈Vertigo〉에서 더욱 과장된다.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의 나선형 구조를 예고하는 듯한 백색의 계단은 소용돌이처럼 내려가고, 그 꼭대기에는 검은 옷의 여인이 위태롭게 서 있다. 가파른 경사는 더 이상 발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은 고립감을 주는데 마치 스필리아르트가 느꼈던 고독 같기도 하다. 대개 우리는 타인의 표정에서 감정의 단서를 찾지만, 그는 사람의 표정을 명확하게 그리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사람과 계단 사이에 놓인 그 아찔한 여백을 통해, 어느 한 지점에서 시작된 고독이 화면 전체의 공기로 전이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거울 앞의 산책자

밤의 도시를 향하던 시선은 방으로 돌아온 뒤 자신에게 향했다. 스필리아르트는 스물한 살 무렵부터 자화상을 그렸고 특히 1907년과 1908년 사이 자신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바라보았다. 오르세 미술관은 이 시기에 그의 자화상 작업 대부분이 만들어졌으며 거울 역시 반복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의 자화상은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높은 이마와 도드라진 광대, 크게 뜬 눈. 빛의 방향을 달리하며 얼굴 한쪽을 어둠 속에 밀어 넣었고 때로는 자신의 모습 자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얼굴만 보고 있으면 오히려 그의 자화상에서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된다.

〈Autoportrait au Chevalet〉, 1908
ⒸAnvers, Koninklijk Museum voor Schone Kunsten

스필리아르트의 자화상에서는 얼굴보다 거울이 먼저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방 안의 거울에는 그의 모습과 뒤편의 공간이 함께 비치고, 그림 속 방은 실제보다 훨씬 깊어 보인다. 가까이 있는 얼굴은 거울 안에서 한 번 더 멀어지고, 같은 방도 다른 장소처럼 보인다. 밤새 오스텐더를 걷고 돌아온 그는 그렇게 방 안에서도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도시가 풍경이 되는 시간

〈La courbe de la digue〉, 1908 ⒸDavid Zwirner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는 리스본의 밤거리를 걸으며 “낮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밤의 나는 나 자신이다”라고 썼다. 스필리아르트에게도 밤은 비슷한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낮에는 목적지를 향해 지나쳤던 것들이 사람들이 사라진 뒤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지하철을 기다리다 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비에 젖은 도로 위로 번지는 가로등 불빛을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처럼. 스필리아르트가 밤의 오스텐더에서 본 것도 그런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같은 도시를 오래 걸었던 사람은 그 도시의 양감과 질감이 배어든다. 그러는 동안 화려한 휴양지는 그에게 몇 개의 선과 빛의 잔상으로 남았다. 모두가 돌아간 뒤에야 또렷해지는 도시와 그 안에 잠시 남아 있는 한 사람. 스필리아르트가 오래 바라본 것은 어쩌면 그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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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에 흐르는 두 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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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한 화가, 거울 속을 산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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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알토가 남긴 습기로 가득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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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디 없는 모란디, 떠나간 화가의 시선을 기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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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그레이와 샤를로트 페리앙, 따뜻한 기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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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떠난 뒤, 물건이 남긴 초상 10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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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서늘한 색 블루, 〈서스페리아〉와 〈포제션〉으로 바라본 청회색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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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달에 보낸 0.4mm의 바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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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세 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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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은 스스로 태어난다, 버내큘러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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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름다움을 담은 클래식 카, 그리고 그 옆에 선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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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cm에 머무르는 소박한 시선, 오즈 야스지로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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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에서 목걸이로, 파블로 피카소와 팔로마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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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시선이 만든 총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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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 로시, 도시의 오래된 기억을 모아 그려낸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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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의 귀환, 낯선 것을 추구하는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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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시계, 케이스백에 새겨진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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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가 발견한 각자의 인생, 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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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함의 여행, 조선의 이름 없는 항아리가 바다를 건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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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에 앞서, 소니 그리고 모리타 아키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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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함이라는 가업, 계승되는 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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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산업 유산의 미학적 환생, 무덱과 폰다지오네 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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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요크의 시각적 유산, 그 궤도를 수놓은 비주얼리스트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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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찰나를 포착했던, 하이엔드 포인트 앤 슛 카메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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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 펜에서 더 로우까지, 비워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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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가 그린, 에로스와 타나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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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은 빈 방에서 태어난다, 도널드 저드와 릭 루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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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영혼을 깨운 무구한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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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스카르파와 아바텔리스의 마법

14

찰나의 실재가 빚어낸 초현실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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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약, 상상력을 붙잡아두는 창조의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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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법, 움베르토 에코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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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자키 쿄코와 도시적 에로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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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라는 완벽한 질서, ‘우연 연산’

09

노력의 흔적을 지우는 기술, 스프레차투라에 대하여

08

미완성과 우연의 초상, 〈휘슬재킷〉

07

악의 미학을 위한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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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여운, 사물이 살아 있는 시간: 루시엔 데이와 마가렛 호웰

05

첫 권의 문학: 세계를 여는 방식에 대하여

04

연옥 단계의 클래식

03

호모 콜렉투스 – MoMA가 수집한 사물들

02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시지프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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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오키프와 마이크로 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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