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페이가 듣는 노래, 왕페이가 부르는 노래


체구가 작은 직원 페이는 스낵바에서 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둔 채 몸을 흔들며 일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배경음악처럼 느껴지지만, 옷차림이 바뀌어도 같은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면 그 곡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 그녀의 하루에 자리 잡은 습관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노래가 흐르는 가게로 경찰 663이 음식을 주문하러 온다. ‘California Dreamin’이 되풀이되는 사이 관객도 어느새 그가 다시 나타나기를, 두 사람이 말을 나누기를 기다린다. 작품 속에서 페이가 듣는 것은 4인조 혼성 포크 록 그룹 마마스 앤 파파스The Mamas and the Papas의 곡이지만 영화에는 페이를 연기한 왕페이 자신의 목소리도 등장한다.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의 ‘Dreams’를 광둥어로 다시 부른 ‘몽중인夢中人’이다. 관객은 한 편의 영화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음악에 몸을 움직이는 페이와, 자신의 음색으로 장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왕페이를 번갈아 만날 수 있다.
음악과 함께 배경이 된 인물


화면 속 페이는 자기 리듬에 익숙해 보이지만, 감독 왕가위는 영국 영화 전문지 《Sight and Sound》와의 인터뷰에서 촬영 초기에 왕페이가 특히 대사 장면에서 많이 긴장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처음 며칠은 양조위와 가게 매니저의 장면을 찍으면서 왕페이가 배경 속에 녹아든 인물로 두었다. 다만 몸짓만은 처음부터 좋았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알고 나면 화면 어딘가에서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몸짓, 일하면서도 대화 중인 경찰 663에게 향하는 시선, 끼어들지는 않고 그 옆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보인다. 관객은 그 장면을 통해 대화에 속하되 속하지 않은 페이의 모습과 일상에 조금씩 익숙해진다. 반복되는 노래는 그런 장면을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긴다. 그런 일상들이 몇번 반복되고 익숙한 리듬 안에서 몸을 흔드는 페이가 누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게 된 관객은 이제 663의 말과 페이의 반응을 함께 살피게 된다.
좋아하던 노래를 자신의 목소리로

〈중경삼림〉으로 왕페이를 처음 만났다면 배우가 노래도 부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1994년에 그녀는 이미 아시아의 스타였다. ‘몽중인’이 실린 앨범 〈호사난상胡思亂想〉도 영화 개봉보다 먼저 나왔다. 당시 홍콩 대중음악에서 외국곡에 광둥어 가사를 붙여 부르곤 했고, 왕페이는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의 곡을 다시 부르거나 중국어권 노래를 부르는 등 한가지 스타일에 매이지 않았다.

왕페이는 1997년 일본 컬처 매거진 《SWITCH》 인터뷰에서 자신의 창법이 타고난 것도 습관도 아니라고 말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들어온 여러 가수의 노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특정한 누군가의 영향으로 설명되기보다 많은 음악가에게 배운 것 중 자신의 음악에 맞는 방식을 찾아왔다. ‘몽중인’에서 원곡을 닮은 부분과 왕페이만의 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멜로디가 떠오르면 악보에 쓰는지 녹음하는지 묻자, 왕페이는 어느 쪽도 아니라고 답했다. 정말 좋은 멜로디라면 기억에 남을 것이고, 잊어버렸다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렇게 남은 좋은 멜로디를 다른 음악가에게 전할 때는 직접 흥얼거리며 불러주었다고 한다.
가사 없이도 전달되는 감정

그렇게 떠올린 멜로디에 반드시 가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왕페이는 음악이 이미 무언가를 전하고 있다면 가사를 억지로 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알맞은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목소리를 소리로 사용하여 무언가를 담아둘 수 있었다. 1996년 앨범 〈부조浮躁〉의 몇몇 곡에는 그렇게 흥얼거림이 나온다. 그녀는 뜻을 모르는 외국어로 노래할 때는 감정을 담기 어렵다고 설명했는데, 아마도 감정에서 시작된 흥얼거림과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을 발음하는 것은 같지 않았을 것이다. 왕페이는 자신의 소리에 감정을 담을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도 계속되는 음악

클수록 좋아요. 그래야 생각을 안 하게 되니까.
─ Faye Wong, 〈중경삼림〉
경찰 663이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자, 페이가 건네는 답이다. 음악을 크게 틀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녀지만 그 와중에도 시선은 자꾸만 663에게 향한다. 생각을 잠시 멈추는 일과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는 일은 별개인 모양이다.

스낵바에서 ‘California Dreamin’에 맞춰 움직이던 페이는 ‘몽중인이’ 흐르는 장면에서 아직 연인이 되지 않은 사람과의 일상을 혼자 먼저 살아보는 사람처럼 보인다. 663이 없는 집에 허락 없이 들어가 방을 정리하고 물건을 바꾸며 함께 보내지 않은 일상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본다. 노래는 페이의 속마음을 그대로 옮긴 대사는 아니지만 그의 집 안에서 자신만의 몸짓으로 그의 집을 멋대로 바꾸어놓는 움직임과 유쾌하게 어우러진다. 그들의 관계를 착각하게 될 만큼.


왕가위의 영화는 다시 보는 대신 사운드트랙을 듣는 것으로 대신할 때가 있다. 그만큼 곡마다 특정한 장면과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몽중인’도 처음에는 페이의 얼굴이 떠올라 틀었다가, 어느새 왕페이의 목소리가 좋아서 듣게 된다. 그러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하듯 집 안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그 노래를 틀어두게 되었다. 그렇게 크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