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숲과 물 사이, 알토의 사우나

핀란드Finland의 전통적인 연기 사우나는 사람이 들어오기 전 검은 연기로 가득 찬다. 장작이 모두 타면 문을 열어 연기를 빼내고 달아오른 돌 위에 물을 끼얹는다. 증기를 가득 채우고 나면 비로소 사우나의 시간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피부가 더는 열을 견디기 어려워질 때 문을 열고 적막한 호수로 뛰어든다. 차가운 물에서 나온 몸은 다시 좁고 어두운 방으로 돌아간다. 사우나는 이 두 온도 사이를 오가는 일이다.



뜨겁게 달군 돌과 물, 나무와 연기로 몸을 데우는 문화는 핀란드와 인접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핀란드의 전통적인 연기 사우나는 ‘사부사우나savusauna’라 불린다. 핀란드의 자연과 생활을 근대건축의 언어로 옮긴 알바 알토Alvar Aalto에게도 사우나는 빼놓을 수 없는 방이었다. 그는 사우나를 편리한 본채 안에 들이기보다 숲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따로 두었다. 그곳에 가려면 집의 문을 열고 잠시 바깥 공기를 맡으며 걸어가야 했다.

ⒸAlvar Aalto Foundation
아이노 알토Aino Aalto와 알바 알토가 1937년부터 설계해 1939년 완성한 빌라 마이레아Villa Mairea에서도 사우나는 본채 맞은편에 별채로 놓였다. 흰 회벽과 넓은 창으로 이루어진 집에서 낮은 캐노피를 따라 걸으면 잔디 지붕을 얹은 목조 사우나가 나타난다. 그사이에는 완만한 곡선의 수영장이 놓여 있다. 따뜻한 거실에서 사우나로 가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와야 했고 뜨거워진 몸은 다시 물을 향했다. 흰 회벽과 거친 통나무, 반듯한 실내와 풀로 덮인 지붕은 이어지지 않았기에 일상과 분리된 경험을 줄 수 있었다.
섬에서 발견된, 증기 오두막

이 배치는 13년 뒤 알토 자신의 여름 별장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952년 54살이라는 나이에 접어들 무렵, 알바 알토는 스물아홉 살의 건축가 엘리사 카이사 마키니에미Elsa Kaisa Mäkiniemi와 재혼했다. 같은 시기 두 사람은 파이얀네Päijänne 호수의 무라찰로섬Muuratsalo Island에 여름마다 머물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휴식을 위한 집인 동시에 재료와 공법을 실제 건축으로 시험하는 작업실이었다. 훗날 ‘무라찰로 실험주택Muuratsalo Experimental House’이라 불리게 된 건물이다.
당시 섬에는 육지와 연결되는 도로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 숲 사이로 난 길을 지나 집에 도착했다. 알토는 섬을 오가기 위해 길이 약 10m의 목조 모터보트까지 설계하고 ‘고향에서는 누구도 예언자가 아니다’라는 뜻의 ‘Nemo Propheta in Patria’라는 이름을 붙였다.

핀란드의 전통적인 여름 별장에는 거의 빠짐없이 사우나가 있다. 전통적으로 사우나는 물가 가까이에 자리하기 때문에, 핀란드인들에게 수영은 여름의 일상이 되곤 했고 알토 부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아내이자 건축가인 엘리사 알토Elissa Aalto는 남편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통나무 연기 사우나의 시공 도면을 완성했다. 자연석 위에 세워진 이 사우나는 잔디 지붕을 얹어 전통적인 사우나와는 다른 외관을 보여준다. 부채꼴 형태의 평면과 통나무를 쌓은 방식 역시 핀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와 다른 모습으로 완성됐다. 디자인은 현대적이지만 재료와 건축 방식은 핀란드의 전통적인 건축법에 기반한다.


사우나에는 작은 탈의실도 딸려 있다. 알토 부부 역시 많은 핀란드인처럼 여름 별장에서 사우나와 수영을 즐기며 수도에서의 스트레스를 벗어났다. 저녁의 고요한 수면을 바라보며 사우나에서 휴식을 취하는 순간, 핀란드의 여름을 가장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본채는 1952년, 게스트동은 1953년에 완성됐으며 호숫가의 연기 사우나는 1954년까지 공사가 이어졌다. 두 사람의 실험은 도면 위에 머물지 않았다. L자형 본채와 두 개의 높은 벽이 감싸는 안뜰에는 벽돌과 세라믹 타일, 줄눈과 쌓기 방식을 달리한 약 50개의 구획이 남아 있다. 어떤 구획은 붉은 벽돌만으로 이루어졌고 어떤 구획에는 타일과 크기가 다른 벽돌이 섞였다. 재료의 성질과 크기, 서로 다른 줄눈이 핀란드의 날씨를 얼마나 견디는지 실제 시간 속에서 살피기 위한 실험이었다.




마치 우연히 호숫가에서 발견된 것처럼 동떨어져 보이는 이 사우나는 숲을 지나 모래가 깔린 물가로 내려가야 했다. 작은 통나무집에서 증기를 쐰 뒤 차가운 호수로 향하고 다시 어두운 방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반복됐다. 알토가 근대적인 본채 바깥에 사우나를 둔 이유를 직접 설명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빌라 마이레아와 무라찰로의 배치는 하나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집에서 숲으로, 불에서 증기로, 뜨거운 방에서 차가운 물로. 알토의 사우나는 몸이 이 순서를 직접 통과하도록 놓여 있다.
내가 살기 위해 산 곳, 월든

비슷한 충동은 한 세기 앞선 다른 호숫가에서도 발견된다. 1845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친구 랄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소유한 월든 연못가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가로 약 3미터, 세로 4.5m의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 2일을 살았다. 철거된 창고에서 얻은 판자를 재사용 해 공사비는 고작 28달러 12.5센트가 들었다. 얼마나 적은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실제 생활로 시험한 기록은 1854년 《월든Walden》으로 출간됐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 19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 자연 속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간 경험을 기록한 《월든》으로 잘 알려져 있다.

ⒸNational Portrait Gallery, Washington, D.C
나는 의식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숲으로 갔다.
삶의 본질적인 진실만을 마주하기 위해
ㅡ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소로의 오두막과 알토 부부의 사우나는 규모보다 그곳에서 무엇을 시험했는가에서 닮았다. 하나는 적게 소유하는 삶을 시험했고 다른 하나는 현장에서 얻은 통나무와 바위로 오래된 경험의 자리를 만들었다. 둘이 만나는 지점은 삶을 작은 단위로 관찰한다는 점이다. 소로가 월든에서 음식과 노동, 시간과 계절을 측정했다면 알바와 엘리사는 무라찰로에서 벽돌의 표면과 날씨, 불과 물 사이를 움직이는 몸을 살폈다.
돌 위에서 피어오르는 숨, Löyly

2020년 유네스코는 핀란드 사우나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며 사우나 경험의 중심에 ‘뢰윌뤼löyly*’가 있다고 설명했다. 뜨거운 돌 위에 물을 끼얹을 때 일어나는 증기이자 사우나에 생기를 불어넣는 기운이다. 유네스코는 이를 ‘정신이자 증기Spirit or Steam’라고 표현한다.
*뢰일리(löyly) : 뜨거운 사우나 돌에 물을 부을 때 피어오르는 증기와 열기를 뜻하는 핀란드어
하루의 끝,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곳

증기가 주는 안정은 단순히 따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야는 흐려지고 바깥의 소리는 차단된 채 몸은 잠시 하나의 온도만을 생각한다. 문을 열고 찬 공기 속으로 나오는 순간에야 긴장은 풀리고 감각은 다시 선명해진다. 서울에서도 이제 곧잘 보이는 도시의 사우나는 낮은 조도와 반듯한 나무 벤치, 절제된 마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방의 모습이 달라져도 그 안에서 몸이 움직이는 순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돌 위에 물을 끼얹고 증기 속에 머물다가 문을 열어 차가운 공기로 나아간다.

ⒸNew York Public Library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빛은 우리에게 어둠과 같다.
우리가 깨어 있는 날에만 아침은 밝아온다.
앞으로 밝아올 날은 아직 더 많다.
태양은 한낱 샛별일 뿐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알토 부부는 숲 아래 호숫가에서 얻은 통나무와 바위, 달아오른 돌로 만든 작은 방을 남겼다. 두 사람 역시 그 안에서 나란히 몸을 데운 뒤 문을 열고 호수로 걸어갔을 것이다. 건축의 형태는 바뀌어도 뜨거운 방에서 차가운 바깥으로 향하는 몇 걸음은 동일하다. 문이 열리면 젖은 피부 위로 숲의 공기가 닿고,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증기는 잠시 보이는 숨이 되어 사라진다. 그렇게 깨어나는 감각은 아직 살아있다는 가장 원초적인 확인과 함께 몸에 새겨진다. 마치 완전히 새로워질 수 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