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우리가 기억하는 뉴욕

처음 뉴욕에 갔을 때가 가을이었다. 9월부터 11월까지, 여름의 기온이 머물다가 불현듯 재킷을 꺼내 들게 되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잘 알지 못할 때 좋아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큰 법이라, 여행자의 눈에는 그곳의 일상도 생경하고 생생해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딘가에 무언가를 조금씩 남겨두고 돌아온 듯했다. 그 뒤로 뉴욕은 가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처럼 여겨졌고, 계절이 다시 가을로 돌아올 때마다 아직 그곳에 있을 것들이 떠오른다. 센트럴파크를 낮은 채도로 물들이는 나무, 책이 더 읽고 싶어지는 쌀쌀한 날에 찾아간 서점의 벨 소리, 스카프를 하고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든 채 걷는 사람들. 뉴욕의 가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풍경들이다. 그 기억에는 영화에서 본 장면들도 겹쳐 있었다. 아직 친구인 두 사람이 낙엽 쌓인 공원을 걸으며 사랑에 대해 다투고, 작은 서점의 주인이 얼굴도 모르는 상대의 이메일을 기다린다. 노라 에프런이 각본을 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직접 연출한 〈유브 갓 메일〉 속 뉴욕이다.

내게 뉴욕의 이미지는 옴니버스 영화인 〈뉴욕, 아이 러브 유〉에서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노라 에프런의 영화에서는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은 순간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두 사람은 공원을 걸으며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알아가고, 〈유브 갓 메일〉의 두 사람은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 서로의 이메일을 읽는다. 함께 걷는다고 곧바로 연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다음 만남과 편지를 기다리는 사이, 그 도시에서 보내는 각자의 하루가 보인다.
단골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서점의 문을 열고, 하루를 마친 뒤 책상 앞에 앉는 모습들. 뉴욕의 명소를 보여주려는 장면이 아니어서 오히려 그곳의 생활이 더 가까이 느껴진다. 인물들을 따라 걷다 보면 그들이 드나드는 가게와 매일 오가는 길까지 자연스럽게 눈에 익는다. 지금도 우리는 글자로 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이 영화들에서는 편지를 쓰고 읽는 일이 하루 중 따로 시간을 내어서 하는 일이다. 오래된 컴퓨터 앞이나 편지지 앞에서 연락이 닿지 않는 동안 그 사람을 생각하고,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그 시간이 더 사랑스럽고 그립게 느껴진다.
노라 에프런의 이야기

그녀가 쓴 것은 다정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다. 애프런은 자신의 결혼이 무너진 경험도 소설 《하트번》으로 옮겨, 배신과 상처를 날카로운 유머로 풀어냈다. 그녀의 어머니는 “Everything is copy”, 무슨 일이든 글감이 된다고 자주 말했다. 애프런은 난처한 일을 겪은 사람으로만 남지 않고, 그 경험을 직접 써서 남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녀가 쓴 사랑 이야기에는 마치 불협화음처럼 민망함과 짜증,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빠지지 않는다. 함께 걷기 좋은 거리와 아늑한 가게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은 제법 까다롭고, 때로는 못된 말을 한다. 그 긴장감 때문에 주인공들의 대화를 더 듣고 싶어진다.
해리와 샐리가 걸었던 계절

해리와 샐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에게 끌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떠나는 두 사람은 샐리의 친구이자 해리의 여자친구를 통해 차를 함께 타게 된다. 뉴욕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말이 잘 맞지 않고, 몇 년 뒤 다시 만나도 곧바로 연인이 되지는 않는다. 각자의 연애와 헤어짐을 겪고, 그 이야기를 서로에게 털어놓을 만큼 가까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친구가 된 두 사람이 가을의 센트럴파크를 걷는다. 노랗게 변한 나무들 아래에서 코트와 니트를 입고 나란히 걷는 모습은 그 자체로 뉴욕의 가을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이 오래 남는 것은 이제 두 사람이 의견이 달라도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사이라 그렇다. 영화 속에서 계절이 바뀌는 동안 관객도 두 사람에게 익숙해진다.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는 모습을 보고 밤에 전화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어느새 둘이 연인이 될지보다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떠올릴 때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순간만큼이나 아직 친구였던 두 사람의 가을이 좋다.
꽃 대신 깎은 연필을 보내는 사람

〈유브 갓 메일〉의 조는 이메일에서 뉴욕의 가을이 좋지 않으냐고 묻는다. 가을이 오면 학용품을 사고 싶어진다며, 상대의 이름과 주소를 안다면 갓 깎은 연필을 꽃다발처럼 묶어 보내겠다고 쓴다. 꽃이 아니라 연필이라니. 그 편지를 읽고 나면 혹시나 지워야 할까 봐 연필로 편지를 쓰던 순간이 떠오른다.


노라 에프런이 동생과 함께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이 영화에서 캐슬린과 조는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현실에서의 캐슬린은 작은 아동 서점을 운영하고 조는 대형 서점 체인의 경영자로 사업 때문에 부딪히지만, 이메일 상대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이로 만난 두 사람은 편지에서 그날 있었던 사소한 일과 다른 사람에게 쉽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일과를 마치고 컴퓨터를 켜 새 메일이 왔을까 궁금해하는 순간. 답장을 쓰기 위해 생각하다 보면 별일 없어 보이던 하루에도 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일이 하나쯤 있다.
캐슬린은 현실의 조를 별로라고 생각해도, 그가 쓴 편지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은 화면 너머 상대의 직업이나 이름보다 말투와 생각을 먼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면 다투는 두 사람이 편지에서는 상대의 하루를 궁금해하고 하루의 즐거움이 된다. 하지만 캐슬린의 서점은 조의 대형 서점이 들어서면서 문을 닫는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장면에서는 마음이 걸린다. 영화를 보며 왜인지 아직 뉴욕에 남아 있을 것 같은 가게가 문을 닫자, 가본 적도 없는 곳을 사라진 것만 같다.
이번에는 퀸스의 부엌에서



에프런의 뉴욕에는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연출작 〈줄리 & 줄리아〉(2009)에서 그녀는 맨해튼의 서점과 카페를 떠나 퀸스의 작은 부엌으로 들어간다. 주인공 줄리 파월은 직장 생활에 지쳐 있고, 글을 쓰는 일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에 실린 레시피 524개를 365일 동안 모두 만들어보기로 한다. 그 과정을 기록할 블로그도 시작한다. 영화는 줄리의 뉴욕과 줄리아가 요리를 배우던 시절의 파리를 번갈아 보여준다.

줄리아가 낯선 도시에서 요리를 배우고 요리책을 완성해 가는 동안, 다른 시대의 줄리는 그 책을 펼쳐놓고 저녁을 준비한다. 애프런의 영화에서 식사는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해리와 샐리가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면, 줄리는 직접 음식을 만들고 그날 겪은 일을 블로그에 쓴다. 요리가 잘된 날도, 망친 날도 글로 남길 이야기는 있다. 고단한 일상에서 다음 요리를 궁금해하고 글을 쓰는 시간은 이메일에서 블로그로 화면은 바뀌어도, 혼자 앉아 그날의 일을 돌아보고 누군가에게 들려줄 문장을 고르는 모습이 닮았다. 뉴욕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꼭 넓은 아파트나 멋진 전망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퇴근 후에 해보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는 생활도 충분히 부러워진다.
다음 편지를 기다리는 동안

애프런의 영화에서 좋아하는 것은 뉴욕을 구경하는 것보다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보고 싶어진다는 점이다. 친구와 오래 걸으며 이야기하고, 저녁을 만들고, 누군가에게 쓸 말을 고르는 일. 여행 중에는 잠깐 흉내 내볼 수 있을 뿐인 생활을 영화 속에서는 한동안 따라가 볼 수 있다.
〈You’ve Got Mail〉 (1998).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센트럴파크를 걷고, 어디서나 볼 법한 델리에 들렀던 것도 그런 마음이었다. 영화 속 하루를 보내보고 싶은 마음. 누구에게나 가끔은 집에 돌아가 읽을 편지가 있고, 저녁을 먹으며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하루라면 좋겠다.

〈유브 갓 메일〉의 사랑은 봄에 완성되고, 해리와 샐리도 가을의 공원에서 마지막 고백을 나누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꾸 다시 보고 싶은 것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장면들이다. 열띤 대화를 하던 산책길, 어떤 편지가 와 있을지 궁금해하던 아침. 결말을 아는 것은 화면 밖의 나뿐이고, 두 사람에게는 아직 다음 날이 남아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의 가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싶었다. 도시를 걷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가을이 허락되면 좋겠다. 어디로 가려 했는지 잠시 잊은 채 조금 더 걸어도 되는 가을. 모퉁이를 하나 더 돌고 나서야 돌아갈 생각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