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n・Index・Symbol’ 시리즈는 배재희 디렉터가 선곡한 음악과 함께 즐겨보세요.
미래의 하늘을 텔레비전의 색으로 그린 소설

첫 문장은 언제나 흥미롭기 마련이고, 1984년 출간된 《뉴로맨서》의 첫 문장은 하늘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색을 설명하는 것은 구름이나 바다의 푸르름이 아닌 텔레비전이다. 방송 신호를 잃은 화면의 회색 잡음이 항구 위로 펼쳐진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미래 기술이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세계를 짐작하게 된다.

항구의 하늘 색은 방송 끝난 텔레비전 화면 색이었다.
ㅡ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뉴로맨서》
시선은 곧 술집으로 옮겨간다. 주인장의 얼굴과 치아, 맥주를 따르는 팔이 차례로 묘사된다. 그 팔은 과거의 군용 의수다. 플라스틱에는 때가 탔고 움직일 때마다 기계음이 난다. 최첨단 세상에서 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오히려 이물감으로 남는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훗날 미국의 문학 잡지《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기존 SF의 지나치게 깨끗한 기술을 두고, 구석에 낀 때를 보고 싶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래에도 누군가는 오래된 기계를 고쳐 쓰고, 닳은 물건이 값을 치르고 거래된다. 《뉴로맨서》가 낯설면서도 사람이 사는 곳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런 사용 흔적 때문이다.
뜻을 알기 전에 따라가게 되는 세계

《뉴로맨서》는 사실 독자에게 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배경지식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서술한다. 그런데도 다음 문장을 서둘러 읽게 되는 이유는, 알지 못하는 세계가 설명 없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허름한 술집의 소리가 먼저 들리고, 맥주를 따르는 팔로 시선이 가고, 그제야 때 묻은 의수가 보인다. 깁슨은 미래의 도시를 한꺼번에 설명하는 대신 인물의 눈에 걸리는 것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몇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그곳의 빛과 공기, 사람들 사이의 거리까지 상상하게 된다.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주변 풍경으로 인물의 고독과 긴장을 전달하는 방식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과 닮아 있다. 하드보일드한 묘사다. 깁슨의 미래에는 새것과 낡은 것이 뒤엉켜 있다. 몸을 바꾸는 기술이 흔해져도 누군가는 오래된 의수를 끼고, 아름다움을 살 수 있어도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얼굴로 살아간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약물과 폭력, 성적 욕망이 첨단 기술과 함께 거리를 채운다. 기계는 발전했지만, 사람은 여전히 중독되어 있고,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고 배신당한다. 낯선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은 이렇게 고전적이다.
깁슨은 이 세계를 처음 방문한 독자를, 낯선 상표와 약물과 개조된 신체가 이미 일상인 자리에 덜컥 놓아둔다. 인물들이 계속해서 쓰는 물건과 단어는 정확히 뭔지 몰라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 하나씩 짐작하게 된다. 항구의 전경에서 술집의 이야기로, 다시 피부와 신경의 미세한 감각으로 거리감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이미 독자가 그 안에 접속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수집보다 배움을 택한 깁슨의 시계

소설을 눈앞에 그려놓는 작가는 현실에서 어떤 물건을 들여다보았을까. 깁슨이 1990년대 후반부터 한동안 깊이 빠져든 것은 오래된 손목시계였다. 미래의 낯선 장치들을 상상하던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서는 과거의 작은 기계를 알아보는 데 시간을 썼다.

시작은 잡지 광고에서 본 오리스ORIS의 빅 크라운 커맨더Big Crown Commander Pointer Date Ref. 7482였다. 검은 다이얼이 마음에 들었고, 밴쿠버에서 구하지 못하자 시애틀에서 시계를 샀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에 드는 시계였지만, 왜 그런 모양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아가면서 관심이 넓어졌다. 그 안에는 과거 군용 시계와 파일럿 워치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섞여 있었다.


(오) Omega Fat Arrow 53 Watch ⒸWatchCharts
새 시계 하나를 산 일이 오래된 시계들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특히 아꼈다고 밝힌 것은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의 마크 XIMark XI와 오메가OMEGA의 팻 애로우 53Fat Arrow 53이다. 깁슨의 관심은 군대에서 사용했다는 이력 자체보다, 필요한 기능에 맞춰 형태가 정해졌다는 데 있었다고 한다. 시간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정확하게 작동할 것. 그 조건을 해결하며 만들어진 형태가 그의 기준이 되었다. 오래 들여다보는 동안 좋아하는 이유도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깁슨은 소유한 시계의 숫자를 늘리기보다 시계를 이해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시계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뉴로맨서》를 쓴 뒤의 일이다. 그럼에도 이 취미를 함께 놓고 보면 소설 속 기계 묘사가 왜 그렇게 자세한지 짐작하게 된다. 왜 이런 모양이 되었고 어떻게 쓰이는가. 그 질문을 반복한 사람은 다른 사물의 형태도 기능에서부터 상상하게 된다.
원형을 벗어나 다시 만들어진 그의 롤렉스

깁슨이 아낀 롤렉스Rolex의 서브마리너Submariner는 롤렉스 전문가인 친구 제임스 다울링James Dowling이 여러 모델의 부품을 조합해 만들어준 시계였다. 5513 모델의 몸체에 5512 모델의 무브먼트와 문자판, 바늘을 넣었다. 시간을 맞추는 손잡이는 왼손잡이인 깁슨이 쓰기 편하도록 반대편으로 옮겼고, 몸체와 테두리는 표면을 살짝 거칠게 다듬은 뒤 검은색으로 코팅해 광택을 줄였다. 깁슨은 이 시계를 ‘콜라주된 서브마리너’라고 불렀다고 한다. 군용 시계의 역사와 기능을 탐구했지만, 원형을 그대로 고집하지는 않았다. 물건이 만들어진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쓰임에 맞게 고쳐 썼다.

군복을 바라볼 때도 비슷했다. 깁슨은 오래된 군복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브랜드 버즈릭슨즈를 좋아했다. 하지만 소설 《패턴 레코그니션》의 주인공에게는 이 브랜드에서 만들지 않던 검은색 MA-1을 입혔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 재킷을 실제로 살 수 있는지 문의하기 시작했고, 결국 브랜드는 소설 속 재킷을 제품으로 만들었다. 시계에서는 기존 부품을 조합해 자신에게 맞는 물건을 만들었다면, 옷에서는 소설 속 인물에게 필요한 색이 실제 제품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설 속 검은 재킷을 현실로 옮긴 버즈 릭슨

2003년 소설 《패턴 레코그니션》의 주인공 케이스 폴러드는 버즈릭슨Buzz Rickson's의 검은 MA-1재킷을 입는다. 오래된 군복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이 일본 브랜드에는 당시 그런 제품이 없었다. 깁슨은 실제 미 공군의 MA-1에 검은색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물에게 어울리는 색을 택했다. 소설이 출간되자 브랜드의 미국 에이전시에는 책에 나온 재킷을 어디서 살 수 있느냐는 문의가 이어졌다.


마침 버즈릭슨도 소설과는 별개로 창립 기념용 검은 MA-1재킷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자들의 문의를 계기로 작가와 브랜드가 연락을 주고받았고, 소설 속 인물의 취향을 반영한 재킷이 실제 제품으로 나왔다. 이 만남은 ‘윌리엄 깁슨 컬렉션’으로 이어져 지금도 그의 이름을 단 검은 옷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깁슨은 시계를 살피며 그 형태가 만들어진 이유를 배웠지만 재킷에서는 반대로 그가 쓴 묘사가 제품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 독자들이 찾은 것은 소설의 분위기를 닮은 옷이 아니라 인물이 입은 바로 그 브랜드의 검은 재킷이었다. 책에 적힌 제품명과 색이 누군가 실제로 입고 싶은 옷을 이어졌다.
다시 화면으로 돌아오는 하늘

곧 소설 《뉴로맨서》도 화면으로 옮겨진다. 칼럼 터너Callum Turner가 주인공을 연기하는 애플 TV 시리즈는 2027년 1월 22일 공개될 예정이다.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Paul Auster는 소설 《유리의 도시》에서 아무리 오래 걸어도 다 알 수 없고 익숙해진 뒤에도 길을 잃게 되는 뉴욕을 그렸다. 깁슨이 문장으로 만든 도시도 그렇게 남아 있을지 모른다.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거리와 얼굴들이 화면에 나타나겠지만, 그곳이 우리가 알던 도시와 꼭 같지는 않을 것이다. 방송이 끊긴 텔레비전의 색으로 시작한 도시가 다시 화면 위에 펼쳐진다. 주인공을 따라 골목에 들어서다 보면 도시를 걷는 사람의 고독과 방향 감각의 상실을 함께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사십여 년 전 쓰인 거리에는 여전히 낯설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가 남아 있다.